잉? 입국심사 없이 그대로 통과라고? 잘못 알아들었는지 동생에게 다시 한번 확인하니 맞단다. 물론 기계에서 여권 스캔하고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얼마나 체류할 건지 묻는 항목에 체크하긴 했지만 대면 심사를 생략할 줄은 몰랐다. 깐깐해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들곤 했던 LA공항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오빠 말대로 캐나다가 “나이스”한 건가.
공항 건물에서 나와 오빠를 기다린다. 집안 행사 참석 때문에 같이 LA에 같이 있다가 오빠는 하루 전날 밴쿠버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우버 타고 가면 된다고 했는데도 굳이 우리를 픽업하겠다고 그리 예약한 것이다. 저 멀리 창문 밖으로 손 흔드는 오빠가 보인다. 우리가 배 고플까 봐 Tim Hortons 도너츠를 사오느라 좀 늦었다고 말문을 연다. 이렇게 오빠가 세심한 사람이었던가.
집으로 가는 내내 오빠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캐나다에 오니 공기가 벌써 다르지 않냐, 저기 프레이저 강을 봐라, 저 다리가 얼마나 오래 됐는지 아느냐, 여긴 애들 어릴 때 블루베리 따러 갔던 농장이다,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밀려들어오는지 주택 단지가 어마어마하게 들어서고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 이곳을 얼마나 보여주고 싶었을까. 오빠의 그 마음이 전해져 코끝이 찡했다.
막내 내외가 합류할 때까지 며칠 여유가 있어 뱅쿠버섬 빅토리아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빅토리아는 캐나다 서부 BC(British Columbia)주의 주도이자, 환상적인 정원 부차드 가든(Butchart Garden)으로 유명하다. 보통 관광객들은 밴쿠버에서 페리를 타고 당일치기로 다녀오지만, 우린 여유있게 1박 하기로 했다.
일찍 서둘렀지만 부차드 가든을 찾는 인파는 여전히 많았다. 이곳이 과거 석회암 광산이었다는 것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여름정원의 테마인장미가 끝물이라 아쉬웠지만 가든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화려한 색감에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식물에 대한 지식이 조금 쌓인 터라 이번엔 개별 꽃의 이름보다 가든 디자인에 더 관심이 갔다. 몇 종의 꽃들이 어루어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관에 사진을 아마도 수백 장 찍은 듯하다.
천천히 정원을 거닐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코스인 이탈리아 정원에 다다른다. 그때처럼 달콤한 젤라또를 한 입 베어물며 생각한다. 이렇게 멋진 곳에 한 번 더 올 줄 알았을까. 새삼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이 즐거워진다.
관광객들의 코스대로 우리도 부차드 가든에 갔다가 BC주 의사당(Legislative Assembly of British Columbia) 앞마당에서 사진을 찍고, Fairmont Empress 호텔을 구경한다. 이번엔 오빠의 권유로 박물관(Royal BC Museum)에도 갔다. 거대한 맘모스와 빙하기 이야기, 그리고 현재의 기후 위기까지 두루 설명하는 자연사 박물관인데 입장료 대비 굳이 들를 만한 곳은 아닌 듯하다.
피셔맨스 와프(Fisherman's Wharf)는 빅토리아 최초의 조선소가 있던 자리인데, 그때부터 조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수상 가옥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물론 현재는 과거와 달리 개성이 강한 디자인의 집들이 대부분이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바다를 배경으로 원색의 수상 가옥이 대비되는 포토 스팟이 많은 건 좋았지만, 실제 거주하는 사람들이 불편할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이틀간 오빠는 스와츠 베이(Swartz Bay)에서 시작해 남쪽 끝까지, 그리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해안도로 구석구석을 달렸다. 경치가 좋은 곳에 멈추었고, 그러다 뜻밖의 장소를 발견하기도 했다. 국물이 당길 땐 베트남 쌀국수 집을 찾았고, 오래된 식당(Mary's Bleue Moon Cafe)에선인심 좋은 캐나다 집밥을맛보기도 했다.
페리 터미널에 예약 시각보다 일찍 도착한 터라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바다 풍경을 감상하며 돌아왔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빅토리아에서의 기억들은 페리에서 본 윤슬처럼내 마음 속에서 오래도록 반짝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