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에 도착해 리무진 버스를 타려고 나갔다가 식겁했다. 덥다고 했지만 세상에 이렇게 뜨거울 줄 몰랐다. 버스가 오기 전에 미리 줄 서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10여 분도 참기 힘들었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인간이란 참 간사하지, 얼마나 됐다고 호들갑은. 적응의 동물답게 금방 익숙해질 거면서.
여행 중에 두 편의 브런치 글을 올렸다. 이른 아침 호텔 방에서, 모두가 잠든 저녁 오빠네 집에서.
글을 쓸 땐 이게 뭐라고 스트레스를 받나 싶었지만, 완성한 후엔 역시나 뿌듯하다. 내가 머물렀던 그 공간의 창밖 풍경까지 내 글과 함께 박제되는 듯생생해진다.
이번 여행은 9년 전 딸이랑 갔던 일정과 많이 겹친다. 그래선지 내겐 추억 여행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샌디에이고-밴쿠버-빅토리아-밴프로 이동하며 40대 끝자락의 나를 떠올렸다. 일에 찌들어 있던 내게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이끌었던 딸처럼, 나도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 제안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 잘했다 싶다.
“야, 주변에서 다들 우리 형제들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아니? 사형제가 어떻게 그렇게 사이가 좋냐고 묻는다.”
“그건…. 우리가 나눌 재산이 없어서야.”
오빠의 말에 내가 신통한 대답을 해서 다들 크게 웃었다.
사실 정답은, 오빠 덕분이다. 그리고 맏이로서 최선을 다해 동생들을 돌본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빠와는 4주 내내 함께 했다. 우리가 이렇게 오래 함께 한 적이 있었던가 싶다. 오빠의 모습을 보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많이 떠올렸다. 온 가족이 모여 북적대는 걸 좋아하시고 딸들이 올 때마다 냉장고에 맥주를가득 채워 놓으셨는데, 오빠가 그랬다.
우린 “맨날 술이야”를 읊조리며 반주를 나눴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오빠가 남은 술 어쩔 거냐고해도, 아무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조카네 아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도 너무 좋았다. 내가 벌써 고모‘할머니’라는 사실이 부담스러워 다섯 살인 작은 애한테 속삭였다.
“비밀인데, 사실 난 할머니가 아니야. 봐, 흰머리도 별로 없잖아(염색했으니깐).”
우린 비밀을 나눈 사인지라 헤어지기 아쉬워했다. 그 아인 내게 그림 한 장을 남겼다. 내 어린 시절 모습이란다.
왜 지금 모습을 안 그렸어? 물었더니 입가의 주름과 안경을 그리기 어렵단다. 그 예리한 눈매라니. 부정할 수가 없네.
그 아이를 보며 문득 할머니가 되고 싶어졌다. 오빠랑 올케가 새삼 부러웠다. 맘대로 안 되는데 말이다.
내겐 이 여행이 어떤 장면들로 남을까. 영화 <애프터 양>에서 ‘양’이 남긴 순간들처럼, 나는 어느 장면을 오래 기억할게 될까.
비현실적인 밴프의 호수 빛깔? 휘슬러 산의 아찔했던 출렁다리? 화려함 그 자체인 빅토리아 부차드 가든?
어쩌면 오래 남는 건 소소한 일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빠네 강아지랑 산책하며 느꼈던 서늘한 여름의 기억, 조카네 꼬맹이들과 김밥을 싸들고 갔던 작은 공원의 풍경 같은 것 말이다.
나는 그런 기억의 조각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에너지가 다른 듯하다. 아마도 여행이 주는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