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여행기를 쓴 지 4개월이 지났다. 밀린 숙제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난 어쩌자고 6년 전 이야기를 단독 매거진으로 만들어 기록하겠다고 마음먹었을까 후회한다. 시작은 언젠가 여행기를 쓰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바쁘게 일하던 때였지만 그 ‘언젠가’를 위해 여행 앱에 일정을 상세히 메모해 두고 짬짬이 사진을 갈무리해 두었다. 그리하여 2022년 12월 비장한 각오로 첫 글을 시작한다. 키워드를 주제로 몇 편의 글을 썼지만 속도가 나지 않는다. 올해 초 계획을 수정해 다시 시작했지만 여전히 첫 여행지에 머물러 있다. 글도 ‘기세’가 중요한데, 최신 여행기를 업데이트하면서 밀리고 말았다.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의 작가 하정의 인스타그램엔 “좋아하는 일이 삶을 밀고 나간다”는 문장이 걸려 있다. 지금은 내가 쓰는 여행에세이가 마음에 차지 않지만 좋아하는 여행이 언젠간 내 삶을 밀고 나갔으면 싶다. 그런 마음으로 ‘굳이’ 지난 여행에 연연하며 어려운 고비를 넘는 중이다.
체코 여행 5일 차,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역시 하이라이트는 프라하 성이다. 여느 때보다 서둘러 호텔을 나선다.
성채 안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물은 성 비투스 대성당이다. 1344년에 착공해 재건축을 거듭하다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한 건 1929년이라고 한다. 성당 건물은 웅장하고 내부는 아름답다. 성당 앞에서 포즈를 잡아 보지만 워낙 큰 건물이라 구도를 잡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 사진을 찍어 주었지만 성당의 첨탑까지 담으려는 욕심과 인물을 놓칠 수 없다는 당위를 만족시키긴 어려웠다. 우리가 찍어준 사진도 이렇듯 비스듬히 기울어진 것 같은 구도였을 것이다.
성당 내부는 어둡지만 창마다 다른 디자인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과연 빛의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을까 미심쩍어하면서도 연신 사진을 찍어 본다. 그중에서도 알폰스 무하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독보적이다.
기대했던 공간, 황금소로. 이곳은 프라하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막사였는데, 16세기 후반 연금술사와 금은 세공사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황금소로로 불렸다 한다.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집 현관은 저마다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시선을 끈다. 아기자기한 내부 공간엔 당시 생활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카프카의 집필 공간이었다는 22번 하늘색 집을 둘러볼 때였을까. 관광객은 많은데 공간이 좁아서 J에게 가방을 맡기고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고작 몇 분이었을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J도 뭔가를 구경하는지 위쪽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런데 어깨에 걸린 내 가방 지퍼들이 모조리 열려 있다. 깜짝 놀라 “여보!” 하는 소리에 사람들이 쳐다본다. “앗! 내 카드?” 가방을 낚아채어 들여다보는 찰나에 누군가 바닥을 가리킨다. 마치 누가 휙 던진 듯 내 발밑에 카드지갑이 떨어져 있다.
혹시 카드만 빼가고 던져버린 건 아닐까. 카드지갑을 집어드는 그 짧은 순간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체크카드와 연결된 계좌엔 우리 여행 경비 전액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위험분산을 하는 게 정석이지만, 모 기관으로부터지원을 받은 여행이었기에 지출내역 정산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뭔가 시도를 할 찰나였는데 실패했던 모양이다. 아, 살았다. 휴~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그 순간부터 모든 사람이 수상해 보였다. 바닥을 가리키던 남자도, 주변에 구경하고 있던 몇몇 사람도….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으나 여행 기분을 망치고 말았다. 역사적인 공간이 주는 장대함과 예술적인 디테일에서 느꼈던 감동이 썰물처럼 사라지는 듯했다. 그 높은 성채에 올라 프라하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데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식겁한 일을 당해서인지 기운이 쭉 빠진다. 프라하 성에서 터벅터벅 큰길 쪽으로 걸어 내려오니 카를교를 건널 때 잠시 쉬어갔던 작은 동네가나온다. 주변에 작은 식당들이 있고, 가로수 그늘이 길게 드리워진보행도로이다. 싱그러운 초록 그늘 아래 놓인 벤치에 앉아 잠시 마음을 살피기로 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오래 기분을 가라앉힐 이유는 없다. 어느 곳에도 있을 법한 평범한 공간에 머무니 다시 평온함이 찾아온다.
바츨라프 광장에 가기로 했다. 이미 여러 번 지나쳐 가긴 했지만 걷는 건 또 다른 느낌이리라. 조금 흐린 날이지만 광장을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활기차다. 체코의 민족영웅이자 국가 수호성인인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뒤쪽으로는 중앙박물관이 보인다. 마치 우리나라 광화문 광장 같은 이미지이다.
화단 한쪽에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꽃과 작은 초들이 보인다. 누군가를 추모하는 공간인 듯해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두 사람의 젊은이 얼굴이 새겨져 있다. 1969년 체코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대학생,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라고 한다. 세월을 뛰어넘어 여전히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체코인들의 사랑이 느껴져서 마음이 울컥했다.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꼴레뇨로 유명한 우핀카스(U Pinkasu)에서 먹기로 했다. 백년가게, 아니 17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식당이란다. 이른 시각에 갔더니 다행히 자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족발과 같으면서도 다른 꼴레뇨의 맛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족발을 즐기지 않는 우리는 꼴레뇨를 남겼고, 사진 폴더엔 주문한 꼴레뇨를 기다리다 찍은 빛바랜 사진 액자만 남아 있다.
계획은 완벽했으나 아쉬움 가득한 하루였다. 다음 여행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기대를 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