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항쟁의 한복판을 힘겹게 통과하던 때였다. 친구들과 나는 이른바 ‘운동권’이 아니면서도 거대한 저항의 움직임에 기꺼이 한 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 <1987>에 나온 그 현장이었다. 매캐한 최루탄에 눈물 흘리고, 굴러오는 사과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 사복경찰을 피해 달리면서 그저 하루가 무사하길 바라던 나날이었다. 시위가 끝나고 약속이나 한듯 하나둘 학교 앞 빵집에 모인 어느 날이었다.
“야, 공부가 제일 쉬운 거였어.”
“이제 늙어서 뛰지도 못하겠다. 오늘은 진짜 힘들었어.”
“난 졸업하거든 인도로 떠날 거야.”
인도?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한 친구가 갑자기 인도로 떠난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다들 눈앞에 닥친 취업을 걱정하고 있을 때, 그 친구의 포부는 당차고 신선해 보였다.
다시 6월을 보내면서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과연 계획대로 인도로 떠났을까. 졸업하고 나서 연락이 끊겨 확인할 길이 없지만, 남들과 전혀 다른 꿈을 꾸었으므로 자유롭게 잘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난 여행이 주는 힘을 믿는 쪽이기 때문이다.
2018년에 떠난 동유럽 여행이 내겐 그랬다. 막연히 생각했던 퇴직이 구체적인 확신으로 다가왔다. 이제 마무리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 프라하 4일차
체스키 크룸로프에 다녀온 다음날 J와 난 프라하 구(舊)시가를 둘러보기로 했다. 역시 여행을 자주 다녀본 S의 선택은 옳았다. 숙소가 구시가와 인접해 있어 어지간한 곳은 모두 걸어서 이동 가능했다.
광장에 들어서면 거대한 얀 후스 동상이 우릴 맞이한다.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봤던 이 동상을 나는 짝퉁으로 먼저 만났다. 전북 부안 자연생태공원 안, 다소 생뚱맞은 곳에 있었는데 실제 모습은 훨씬 거대하고 힘이 느껴진다. 프라하대학 총장이었던 얀 후스는 마르틴 루터보다 100여년 앞서 종교개혁을 시도한 인물이라고 한다.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설교했을 뿐 아니라 부패한 가톨릭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그는 결국 화형을 당한다.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을 산 그의 동상 앞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광장 옆엔 천문시계와 전망대로 유명한 구 시청사가 있다. 당시엔 외벽 공사중이라 12사도들이 차례로 나와 시각을 알리는 이벤트를 보지는 못했지만 전망대에 오르면 80m 높이의 탑이 있는 틴 성모마리아 교회와 구시가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구시가 광장 북쪽으로 걸어가면 과거 로마제국이 유대인들을 강제 이주시킨 유대인지구가 나온다. 지금은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와 공동묘지 등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핀카스 시나고그가 인상적이었다. 내부 벽면에 새겨진 문양이 대체 뭔가 싶었는데, 유대인 대학살 당시 희생된 이들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다. 끔찍한 시대를 살아낸 인류에게 두번 다시 이런 비극이 빚어져서는 안 된다는 걸 가슴 깊이 새겨 주는 듯했다.
# 카를교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카를교. 621m 길이의 돌다리인 카를교는 프라하의 구시가와 신시가를 이어주는 다리이자 대표적인 랜드마크이다.
먼저 카를교가 한눈에 보이는 구시가 교탑(Old Town Bridge Tower)에 올라갔다. 블타강을 오가는 유람선의 위치까지 생각하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으나, 결과물은 눈으로 보는 것만큼 훌륭하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그러나 사진이 대수랴. 한눈에 이 풍광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탁 트였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좁은 전망대 꼭대기에 올라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수십 장을 찍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카를교엔 30개의 조각상이 있는데 관광객들은 얀 네포무츠키 신부 동상 앞에 발길을 멈춘다. 단 하나의 소원을 생각하며 그 동상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이다. 당시 보헤미아의 왕인 바츨라프 4세에 의해 처형당한 억울한 죽음이었으나 체코인들은 그를 국민적인 성인으로 추앙한다.
서서히 석양이 내려앉는다. 우리도 교탑에서 내려와 카를교를 건너기로 한다. 야경을 보기 위해선지 점점 더 많은 인파가 몰려온다. 남들처럼 얀 네포무츠키 조각상 앞에 줄 서서 소원을 빌진 않았지만 모쪼록 떠나는 내 뒷모습이 아름답기를 바랐던 것 같다. 우리는 천천히 카를교를 건너갔다가 되돌아왔다. 조금 일찍 저녁을 먹을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나름 계획이 있었다. <꽃보다 할배> 프라하 편에 나온 레스토랑, 카를교 야경이 멋있다는 그 곳에서 저녁을 먹으리라. 그러나 레스토랑엔 이미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관광객들이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고, 붐비는 곳이 그렇듯 친절하지도 음식이 맛있지도 않았다. 사실 야경을 보려면 굳이 그곳일 이유도 없었다. 내가 TV에서봤던 건 레스토랑 뷰가 아니라 어쩌면 드론 뷰였는지도….
가끔 꽝일 수도 있지만 이런 시도를 하는 것도 여행의 맛일테지. 마치 하나하나 도장을 깨듯 TV에서 본 동유럽 도시들을 여행하는 우리 일정엔 또 어떤 변수들이 숨어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