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여행기를 쓰는 게 가장 어려워요. 뭔가 시작하려면 가장 최근에 했던 국내 여행, 아니면 산책 이야기부터 시작하세요."
얼마 전 김남금 작가의 강의를 들으면서 깊이 공감했다. 이래서 힘든 거였군. 내가 축적해 뒀다고 생각한 건 그저 일정일 뿐 기록이 아니었던 것.
그 얘기를 듣고 지난 글을 다시 읽어봤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여행 일정을 굳이 다 쓰려고 채웠던 문장들을 덜어내고 주제가 드러나도록 살을 붙였다.
글쓰기에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잊곤 한다. 수십 분을 고민하며 쓴 문장들일지라도 쓸데없다고 판단하면 버려야 한다. 군더더기 없는 글을 쓰고 싶다.
# 뜻밖의 인연
프라하에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우리나라 시외버스 터미널을 예상하며 내렸는데 허허벌판이다. 차고지 같은 데서 막막해하는 그때, 우리나라 대학생 둘을 만났다. 그들도 당황해하는 기색이다. 보도도 없는 길, 잘차흐(Salzach) 강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전철 정거장까지 함께 걸었다.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앳된 얼굴, 피곤한 기색이지만 열차를 기다리며 서로 어깨를 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학생들과는 며칠 뒤 할슈타트에서 또 만났다. 배를 기다리는데 낯익은 얼굴들이 보여 반가웠다. 자유여행을 하는 우리와 계속 만나니 그들의 여행 일정이 궁금했다. TMI를 무릅쓰고 물어봤다. 프라하-잘츠부르크-할슈타트….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두브로브니크까지 똑같았다. 거기에서 우린 다시 자그레브로 이동하는 데 반해, 그 친구들은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떠난다고 했다. 지혜로운 동선이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표정이 밝아서 좋았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둘의 우정이 더 짙어지길, 무탈하고 건강하길 빌어주었다.
# 오후 6시, 영업종료
잘츠부르크의 도시 이미지는 깨끗하고 조용하다. 관광지이지만 영업시간도 길지 않다. 첫날 게트라이데 거리에 갔을 때 일이다. 무엇을 파는 가게인지 멀리서도 간판을 보면 알 수 있는 거리를 둘러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모차르트의 도시답게 모차르트 생가 건물이 자리하고 있고, 초콜릿에도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파란 리본의 초콜릿 상자가 디스플레이된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더니 손을 내젓는다. 이미 영업이 끝났단다. 오후 6시. 칼 퇴근, 칼 영업종료. 손님 한 명에게라도 더 팔아야 하는 게 장사 아닌가 싶은데 내일 오란다. 안타깝게 못 샀다고 생각하니까 더 사고 싶어진다. 다음날 우린 다시 그 거리로 갔다. 이번엔 잘츠부르크 사람들처럼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미카르트 다리를 건넜다. 다리 난간엔 어제 허투루 봤던, 수많은 이들의 바람이 담긴 색색깔의 열쇠가 반짝이고 있었다.
# 즐거운 헬브룬 궁전
잘츠부르크에선 화려한 미라벨 궁전보다 헬브룬 궁전에 머문 시간이 더 기억에 남는다. 1616년에 대주교 마르쿠스 지티쿠스가 여름 별궁으로 지은 곳이라는데, 이 주교가 무척 심심했던 모양이다. 정원 곳곳에 분수를 숨겨놓고 방문객들에게 물벼락을 선사한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려는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공간을 설명하는 해설자의 익살에 사람들이 웃고, 기꺼이 손을 들고 나선 어린아이에게 속임수 분수가 물줄기를 쏟아낸다. 사람들이 용감했다며 아이에게 박수를 보낸다.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지여서였을까, 모처럼 가족 단위 관광객들을 많이 볼 수 있어 좋았다.
잘츠부르크에선 내내 마음이 여유로웠다. 케이블카를 타고 운터베르크 산에 올라가 운무만 보고 내려오면서도 집밥 같은 브런치 먹었으니 됐다고 했고, 호헨잘츠부르크 성에서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는데도 카페에서 쉴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재미있게 푸니쿨라를 탔고, 여유롭게 광장의 모습을 즐겼다.
모차르트가 오르간을 연주했던 성당으로 유명한 잘츠부르크 대성당은 밝은 색 대리석 마감 덕분인지 밝은 분위기였다. 여행하면서 만난 성당에서 얼마나 많은 기도를 올렸던가. 긴 여행이 끝날 때까지 안전하길, 가족들이 무탈하고 건강하길,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잘 마무리하고 아름답게 떠날 수 있기를…. 우리가 누리는 하루는 가까운 이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기도와 바람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