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기도
지난 연말 사촌 동생 결혼식장에서 숙모들을 만났다. 아버지 남동생이 줄줄이 다섯이니 숙모도 다섯 명이다. 난 작은아버지 순서에 따라 둘째, 셋째… 작은엄마라 불렀다. 이렇게 모두 한자리에서 만난 게 언제였을까. 아마도 내가 중학교 1학년 무렵, 우리집이 잘 살던 때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장남인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자, 가까스로 유지되던 형제애는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그들이 내 얼굴에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동안, 나도 그들의 젊은 날을 오버랩해 본다.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1번 커플. 작은 아버지의 바람기 때문에 애저녁에 갈라섰는데도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혼란스럽다. 소식 못 들었는데 다시 합치셨나? 세월을 뛰어넘어 마치 얼마 전에 뵌 듯 살갑게 이야기를 꺼내 본다.
“이제 두 분 사이가 좋아진 거예요? 작은 엄마가 용서해 주신 거예요?“
“용서는 무슨. 그게 어떻게 없던 일이 되겠니?”
작은엄마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놈의 정은 남아 있는지, 작은아버지가 관절이 안 좋아 걱정이라고 말한다. 젊은 날의 배신감과 서운함은 어느덧 세월과 함께 많이 녹아내린 듯하다. 작은아버지와 달리 두 아이를 보란 듯이 잘 키워냈다는 자신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2번 커플은 마치 남인 듯 몇 줄 떨어져 앉아 있다. 작은아버지에게 인사하며 왜 같이 앉지 않느냐니까, 아예 살림도 따로 한단다. 그럴 만도 하지, 좀 사람을 귀찮게 하나. 게다가 자기밖에 모르니 가족들도 넌덜머리 날 밖에.
그는 평생 일하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 옆에 빌붙어 호가호식하던 그는 아버지가 부도를 맞자 마치 형 때문에 못 살게 된 양 행패를 부렸다. 그 모습을 본 뒤로 난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형에게 패악질을 하고도 낯 두껍게 명절 때마다 나타난다기에 난 일부러 느지막이 친정에 가곤 했다. 30여 년 만에 아버지 장례식장에 맞닥뜨린 그는 생전의 우리 아버지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여전했고, 어디 어디가 아프다는 엄살뿐이었다.
아버지 장례를 마친 뒤, 그 작은아버지가 오빠에게 밥을 한번 사겠다고 꼭 연락하라고 했단다. 그 옛날 그는 오빠에게도 어른답지 않은 짓을 했다. 아버지 사업이 실패한 뒤 그는 엄마가 모아놓은 우리집 비상금마저 털어먹었다. 형수한테 얘기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걸 알기에 조카를 꼬드긴 것이다. 급한 데 갚을 곳이 있으니 빌려달라고, 융통하고 금방 돌려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하곤 입을 씻었다. 난 아직도 그 밤을 기억한다. 엄마는 절대 안 된다고 말리고, 오빠는 작은아버지가 설마 조카와 한 약속을 어기겠냐고 빌려주자며 옥신각신하던 그날.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엄마의 직감은 옳았다. 고작 스무 살을 갓 넘긴 오빠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곧바로 군에 입대해 버렸다.
그 후로도 미안하다, 사정이 이렇게 됐다 말 한마디 없던 그 작은아버지와 굳이 밥을? 나는 마뜩해하지 않았지만 오빠는 또 그답게 만나러 갔다.
“야, 작은아버지도 이제 늙었더라. 사람이 많이 변한 것 같아. 이제 용서하자.”
“변하면 죽는다던데? 오빠, 난 아직 마음이 그렇지 않아.”
“난 용서하기로 했다….”
오빠는 참 쉽게도 용서한다 생각했다. 그게 3년 전이었다.
사촌 결혼식장에 우리 식구라곤 여동생 내외와 나뿐이다. 엄마가 요양원에 계신 걸 뻔히 알 텐데, 아무도 엄마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아무리 무심한 사람들이더라도 아직 여전히 형수인데, 서운하다. 어떠시냐는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는 건, 설마 우리가 불편해할까 싶어서일까.
헛헛한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길. 사촌동생 C가 내 곁으로 온다.
“누나, 진짜 반가웠어요. 또 만나요.”
“그래, 네 얘긴 많이 들었다. 사업이 잘 된다니 나도 좋더라.”
“아니에요. 그저 열심히 할 뿐이에요.”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그 작은아버지와 너무도 다른 아들. 어릴 적 C는 조금 늦된 아이라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래보다 말하는 것도 늦었고 숫기마저 없었다. 그후로 엄마한테 들은 소식이라곤 아직 결혼도 못했다더라 정도였다. 그랬던 아이가 이제 집안에서 가장 노릇을 든든히 하는 모양이다. 수줍어하던 어릴 적 그 아이가 나를 불러 세워 내 마음을 녹인다. 아버지가 하지 못한 용서를 청하는 것만 같다.
너희 집이 이만한 건 네 덕인가 보다. 우리가 만나지 않았던 건, 전적으로 부모들 때문이다. 사실 너에게 나쁜 감정이 있을 리 없고, 우리가 못 만날 이유도 없지….
그렇지 않아도 껍데기만 남은 듯한 노인의 모습을 보며 더 이상 미워할 결기마저 사라진다 싶었는데, 그의 아들 C를 보아서라도 이제 용서해야 할 것 같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제야 온전한 기도를 올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