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마디
“미국에 돌아가거든 아버지 이야기를 쓸 거예요.”
장례식장에서 시아버지의 셋째 딸이 서툰 한국말로 내게 말한다. 나도 궁금하다고 하니까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란다. 기다렸지만 메일은 오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내가 결혼한 다음 해에야 만났다. 오래전에 사별한 시어머니가 그때 재혼하셨기 때문이다. 당시 쉰셋밖에 안된 시어머니는 미국에 사는 지인의 소개로 아버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셨다.
나는 아버님이 좋았다. 솔직히 말하면, 어머니를 달라지게 만든 아버님이 좋았다. 무엇보다, 걱정 많은 시어머니가 우리에게 쏟는 관심이 적어져서 마음이 편했다.
시아버지는 정말 딸처럼 나를 챙겨주셨다. 아마도 ‘새’아버지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당신의 처지에서 내가 제일 편했을 것이다. 내가 처음 운전면허를 딴 날. 아버님은 당신 차로 완벽하게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 주셨다. 무척 답답했을 텐데, 그렇게 평정심을 유지하시는 걸 보고 정말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다.
아버님의 역사는 사실 딸의 글이 아니더라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미국에 가게 됐는지, 병아리 감별사 일부터 시작해 얼마나 많은 직업을 거쳐 왔는지, 자식들을 어떻게 키워냈는지, 처음으로 당신 집을 손수 지었을 때 마음이 어땠는지…. 이 모든 일을 알 수 있었던 건 아버님과 나눈 반주 덕분이었다. 전처와 이혼하게 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끝내 이야기하지 못한 그 사건이 당신에게 끼친 상처는 큰 듯했다. “걱정 마라, 네 어머니 보내고 내가 가마” 말씀하시던 아버님은 담도암으로 먼저 돌아가셨다. 퇴직하면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겠다는 계획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18년이 되어가지만, 그분과의 추억은 여전히 살아 있다. 아마 그분의 셋째 딸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써내려 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신 지 3년이 되어 간다. 그런데 시아버지에 대한 기억만큼도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다.
도대체 우리 아버진 왜 그렇게 평생 일만 하셨을까. 그렇게 백날 일해도 당신이 남긴 건 천만 원이 채 안 되는 통장 하나가 전부였다. 매달 들어오는 노령연금을 모아둔 그 통장. 당신 장례비로 쓰라는 듯, 아버진 그 돈만 남기고 떠나셨다.
아버진 알코올이 들어가야 말씀을 좀 하시는데 집에서는 거의 술을 드시지 않았다. 하긴, 일하시는 모든 날이 음주 상태였으므로 하루 이틀쯤 쉬는 날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버지 주변엔 “오늘도 반주 한 잔 하셔야죠?”라고 권하는 이들이 옆에 꼭 있거니와, 당신도 노동의 힘겨움을 털어내는 데 그만한 진통제가 없다고 생각하시기에 늘 얼굴이 불콰한 상태도 귀가하시곤 했다. “오늘도 또 두꺼비(진로소주) 드셨네?” 그러면 늘 한 잔밖에 안 먹었다고 하셨지만, 아버지의 술 한 잔이 소주잔이 아니라 음료수 컵 한 잔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평소의 아버지는 과묵을 넘어 말 없음 그 자체였다. 어릴 적, 엄마는 아빠한테 전화 거는 건 꼭 내게 시켰다. 모처럼 별미 요리를 한 날, 온 가족이 다 같이 먹으면 좋겠다 싶은 날. 엄마는 “아빠, 오늘 저녁에 일찍 들어오시래요~”같은 주문형 전화를 시키곤 내게 반응을 물었다.
“아빠가 뭐라시던?” “뭐라긴. 알았어! 그러시지.”
내가 흉내 낸 아빠의 말투가 제법이었을까, 그럴 때면 엄마는 늘 웃으셨다.
그런 아버지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긴 건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다. 우리집 반항아 내 동생이, 아버지가 주무실 때 바지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는 걸 보셨던 모양이다. 며칠 뒤, 여느 날처럼 술 한 잔 걸치고 오신 아버지가 내게 그날 이야기를 해주셨다. “네 동생이 말이다 … 네가 돈 가져가는 거 봤다, 아빤 네가 달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그런데 몰래 가져가는 건 안 된다고 단단히 얘기했다.” 내게 왜 그 얘기를 해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처음으로 우리 아빠가 이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분이던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냥 전해 듣는데도 괜히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따뜻한 꾸중’이었다고 기억한다.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말씀하신 부분이 감동이었나? 아무튼.
따뜻함이라면 그날의 일도 잊을 수 없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했다. 공단 구석,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한참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집이었다. 빌라에 사는 게 싫어서 돌잔치 때 들어온 금반지까지 팔아 간신히 보증금을 마련했는데, 이사한 뒤로 아이가 계속 아팠다. 시어머니는 이사를 잘못 가서 그런 것 같다고 한소리 하시고, 우리 엄마는 이참에 내가 교회에 다시 다녔으면 싶어선지 나 때문이라고 했다. 가뜩이나 힘든데 두 분 다 전화를 걸어 내 속을 긁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진 평소 딸에게 전화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런데 손녀가 아프다는 소식 들었다고, 괜찮냐고 물으시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저 “괜찮냐”는 단 한마디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전라도 사투리 ‘거시기’처럼 모든 말에 두루 쓰일 법한 말, ‘괜찮니’라는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너) 괜찮냐, (아이도) 괜찮아질 거다는 토닥임에 전화를 끊고 나서 아이처럼 울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듣기 좋은 그 음성으로 ‘괜찮니? 다 괜찮아질 거다’라고 말씀하실 것 같은 아버지. 얼마 전 성당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뒷모습의 어떤 분을 뵙고 울컥했다. 갑자기 아버지의 부재가 느껴져 서러웠다.
사실 아버지만 무뚝뚝한 게 아니었다. 나 역시 살가운 딸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식도암 때문에 힘들어도 조금 더 드셔보라고 권할 걸, 한 숟갈이라도 맛보시라고 할 걸…. 소용없는 깊은 후회가 밀려온다.
얼마 전부터 갑자기 동태찌개가 먹고 싶었다. 아버지 기일이 다가오기 때문일까. 옆에 계시다면 분명히 대가리가 맛있다며 살점 없는 그 덩어리를 당신 그릇에 먼저 덜어 놓으셨을 것이고, 내겐 언제나처럼 가운데 토막을 건네셨을 것이다.
보고 싶은 우리 아버지, 세상 누구보다 따뜻했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