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조금씩 스페인어
학교를 졸업하고도 한참 지나 배운 컴퓨터는 신세계였다. 과제 리포트를 손글씨로 써서 제출하고, 원고지에 기사를 작성했던 시절을 살았으니 가히 충격이었다.
시누이가, 구청에서 하는 무료 컴퓨터 강좌가 있으니 배워 보라는 말에도 처음엔 시큰둥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뭔가를 배운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거라도 배운 덕분에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는(이름은 거창하나, 문서로 된 텍스트를 입력하는) 공공근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IT 산업 육성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운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다.
몇 개월밖에 일하지 않았으나 고용보험 덕분에 재취업을 위한 심화 과정 컴퓨터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유행했던 웹디자인 강좌였다. 뭘 모를 때라 멋지게 홈페이지를 만들어 내 사업을 하겠노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홈페이지를 제대로 만드는 것도, 그것으로 돈을 벌 아이템을 정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엉성한 홈페이지엔 내 일상과 아이들을 위한 책, 교육용 게임 소개 등이 담겼던 것 같다. 사업의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배짱 좋게 여성 홈페이지 경진대회라는 데 출품해 우수상을 받은 덕에 뭐라도 해낸 사람이 됐다. 당시 심사를 맡은 어떤 분이, 아줌마의 일상이 담긴 내 글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해 줘서 고마웠다. 홈페이지의 콘텐츠가 좋다는 건 아니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렵사리 배워 만든 홈페이지는 금세 촌스러워졌다. 포토샵으로 힘들게 만들던 아이콘은 그냥 쓸 수 있는 것들이 넘쳐났고, 홈페이지도 무료 툴이 쏟아졌다. 내가 배우는 것보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내 길이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때 처음 접한 컴퓨터의 세계는 적어도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정도의 스마트함을 갖는 데 도움이 됐다. 컴퓨터 활용 능력이 없었다면 마흔이 넘어서 시작한 새로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처음 경험한 평생교육은 충분히 값진 것이었다.
지난 6월 우연히 평생교육이용권을 알게 됐다. 정부가 제공하는 교육 바우처로, 성인 학습 이용자에게 교육 비용을 직접 지원하는 제도란다.
평생교육이용권 홈페이지에서 거주 지역 광역단체를 클릭해 신청서를 작성하면 끝. 인원이 한정돼 있어 될까 싶었는데 경쟁률이 세지 않은 소도시의 장점이 있는 모양이다. 선정됐다는 알림이 왔고 거금 30만 원이 생겼다. 뭘 배울까. 이 바우처로 쓸 수 있는 교육기관은 한정돼 있다. 오프라인 교육 기관으로는 바리스타나 미용, 베이킹&요리 학원과 백화점 문화센터 정도이다. 고민에 고민 끝에 온라인으로 배울 수 있는 스페인어 강좌를 신청했다. 이름도 거창한 ‘끝장 패키지’. 과연 끝장을 볼 수 있을까. 돈 값을 할 수 있을지 자신 없었지만, 바우처 덕분에 저질렀다.
며칠 뒤 두껍고 무거운 책들이 도착했다. 책만 봐도 어지러웠다. 괜한 일을 벌인 걸까. 저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는데 스페인어 능력시험용 교재 비중이 높은 것 같다.
그래도 뭔가를 배운다는 설렘은 좋다. 아마도 난생처음 인터넷 강의를 듣는 것 같다. 학교 강의도, 외국어도 대면 강의만 들은 세대이니 말이다. 교재를 펼치고 첫 강의를 클릭한다.
인터넷 강의는 20분 남짓. 강사는 반복해서 확인한다. “따라 하고 계신 거죠?” “매일 자기 전에 한번 더 복습하세요.”
매일 조금씩 <듀오링고>로 스페인어를 공부한 게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기초 교재는 아는 내용이 많다. 따라갈 만하다. 하지만 단어를 외거나 동사 변형 따위를 기억하는 건 어렵다. 단어장에 써 놓은 단어는 쓰자마자 휘발되는 것 같다. 강사의 발음대로 따라한 문장은 강의가 끝남과 동시에 잊힌다. 자기 전에 복습을 하는 건 제일 지키기 힘든 미션이다. 굳이 공부하다 자는 걸 선택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매일 한두 강좌씩 들으려고 노력한다. 수강기간은 1년 6개월. 그때까지 저 벽돌책들을 깨나가야 한다. 3% 대를 맴돌던 진도율이 천천히 올라간다. 이제야 12% 달성.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며칠 전에 책상 정리를 하면서 다운로드한 스페인어 커리큘럼을 프린트해서 벽에 붙여 두었다. 옛날 사람이라 이렇게 직관적인 게 좋다. 끝낸 강좌 칸에는 색연필로 알록달록 색칠을 했다. 어릴 적에 많이 했던 포도알 채우기가 생각난다. 저 끝까지 다 색칠하면 아마도 스페인어 자격시험 DELE를 볼 수 있는 모양이다. 굳이 시험을 볼 생각은 없지만 이왕 시작한 김에 천천히 공부해 볼 생각이다. 그야말로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