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은 한 번이면 돼
고구마 vs. 감자
반찬으로는 감자를 좋아하지만 간식거리로는 단연 고구마 쪽이다. 어렸을 적 엄마가 쪄준 고구마를 먹으며 책을 읽을 때가 참 좋았다. 빗소리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다.
소도시로 이사 온 이후 매년 고구마 축제에 간다. 올해도 행사장에 가서 고구마 10kg을 사 왔다. 몇 년 전, 고구마 밭에서 후회했던 그날이 생각난다.
계기는 시청에서 온 문자 한 통이었다. 가족 단위 고구마 캐기 체험 참가자 모집!
오, 재밌을 것 같은데?
아는 언니에게 정보랍시고 알려줬더니, 새고샌 게 고구마야, 하며 웃는다. 아차, 언니네는 밭이 있다고 했지.
분명 남편은 안 간다고 할 텐데, 혼자서라도 체험을 해 봐?
육십 평생 살도록 고구마를 캐본 적이 없다. 아이들은 유치원에서라도 고구마 캐기 체험을 했던 것 같은데 난 기억이 없다.
직접 캐오면 더 싸기도 할 거야. 그래, 해보는 거야.
처음에 5kg에 체크했다가 얼마 안 되지 싶어 10kg으로 수정했다. 동생 나눠 주고 딸한테 갈 때도 몇 개 챙겨야지….
남편은 운전하고 고구마 옮겨 주는 것만 할 거라고 단단히 이른다. 좋아, 그거면 돼.
부푼 마음을 안고 가벼운 옷차림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인기 있는 행사인가? 주차할 곳이 없다. 체험장은 어디에 있는 거지? 안내하는 사람도 안 보인다.
스텝인 듯한 사람을 찾아 물었더니 저 길로 죽~ 10분만 걸어가면 된단다. 이정표도 없이 그냥 가라고? 불안하다 싶었는데 길눈이 어두운 나는 찾지 못하고 되돌아온다. 날씨는 덥고 다시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주차할 곳을 찾던 남편을 불러 다시 체험장으로 이동한다. 시작하기 전부터 힘이 빠진다.
고구마 밭엔 가족 단위 체험 신청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관계자들이 이미 캐둔 고구마가 있으니 그냥 가져가도 된다는데, 명색이 체험인데 그럴 수야 없지. 호미라도 만져볼 생각에 괜찮다고 얘기한다. 고구마 10kg를 담을 플라스틱 박스와 호미, 장갑을 받아 들고 밭으로 들어간다. 땡볕이다. 생각보다 많이 덥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데로 가서 고구마를 집어든다. 내가 시장이나 마트에서 본 고구마들은 다들 잘 생겼던데, 얘들은 왜 이렇게 못 생겼을까, 생각한다. 자잘한 고구마 줄기에서 언제 제대로 된 고구마를 발견할까 싶다. 보물찾기 하듯 이 고랑 저 고랑 고구마 두둑을 건너간다.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올해 날씨가 안 좋아서 그렇단다. 맛은 어떠냐니까 보통이란다.
“아니,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해도 돼요?”라고 물었더니, 자긴 거짓말을 못 한단다.
‘그냥 사 먹을 걸….’ 괜히 왔다는 생각이 스친다. 언제 10kg을 채울까.
사실 고구마를 캐는 게 아니라 헤집어 놓은 고구마 줄기에서 줍는 거다. 아마도 사람들이 한바탕 훑고 가서 없는 모양이다. 어떤 가족은 직접 캐보려고 호미질을 한다. 나도 옆에서 시도해 봤지만 역부족이다. 흙이 단단한 데다, 잘못 건드리면 고구마들이 상할 것만 같다.
마침 고구마를 헤집는 기계 작동음이 들린다. 경운기 소리 같은 그 기계가 지나가면 고구마 두둑이 파헤쳐지고 황토 흙 속에서 고구마들이 얼굴을 내민다.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그 발간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작고 못 생겼다고 무시했는데, 쟤들도 자라느라 얼마나 애썼을까, 측은지심이 생긴다. 못 생겼어도 작아도 고구마 줄기에서 하나씩은 건져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넓은 고구마 밭에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까르르 웃으며 내가 캔 고구마가 얼마나 예쁜지, 얼마나 큰지 자랑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그 가족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다 늙어 이게 무슨 재미라고 사서 고생을 하나 싶다. 해는 점점 뜨거워지고, 줍는 것도 힘들어 허리가 아프고, 땀이 비질비질 나고…. 힘들다. 그만해야겠다. 이 정도면 얼추 채운 것 같다. 종이 박스로 옮겨 포장해 주는 아저씨가 미리 캐둔 잘 생긴 고구마들을 몇 개 얹어 준다. 무게를 재보니 11.3kg. 이 정도면 양심적이란다. 아, 무게 따윈 하나도 안 중요하다. 고구마 캐기 미션 완수, 그거면 됐다.
만사가 귀찮다. 사 먹을 걸…. 이러고서 무슨 귀촌의 환상을 갖는지, 아이고….
행사장으로 돌아와 판매장을 둘러보니 때깔 좋고 큰 고구마들은 거기 다 와 있었다. 심지어 비싸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와 고구마를 정리하니 자잘하고 못 생긴 것들이 하나 가득이다.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그중에 괜찮은 것들이야, 내가 데려온 거잖아. 황토흙에서 막 얼굴을 내민 모습이 얼마나 예쁜데….
다행히 고구마는 맛있었다. 예년보다 작황이 좋지 않았다는데도 괜찮았다.
그 후로 난 매년 고구마 사러 행사장에 간다. 체험은 이제 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