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 스티커북 실종사건

엄마가 미안했어

by 데이지

“엄마, 나 지금도 억울해.”

S가 아직까지 그때 일을 마음에 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 애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단짝 친구 A라는 애가 있었다. 둘이 같이 다니면 사람들이 자매냐고, 쌍둥이냐고 물을 만큼 둘은 생김새도 비슷했고 죽이 잘 맞았다. 보통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가 다른 반이 되면서 자연스레 사이가 멀어지는데 A와는 두 가지 큰 일을 겪으면서 헤어지게 됐다.


첫 번째 사건은 산타클로스에 대한 천기누설(부디, 이 글을 보는 어린이가 없기를) 편.

먼저 내 얘기를 하자면, 나는 유치원 때 산타가 준 ‘사브레’ 과자에 많이 실망한 기억이 있다.

울면 안 된다고 해서 울지도 않고 엄마 아빠 말씀도 잘 들었는데 왜 내 선물은 이거예요? 쟤네들은 엄청 큰 장난감을 받았는데 너무 차이가 나잖아요?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진짜 산타 맞아요? 어린 마음에도 분통이 터졌다.

우리 애들에게는 행복한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억을 갖게 해 주고 싶었다. 한 치의 의심이 스며들지 않도록 각본을 잘 짜야 했다.

작은 사이즈의 선물일 때는, 아파트엔 굴뚝이 없으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우유투입구에 넣고 가셨나 보다 하며 현관문 앞에, 큰 선물은 살짝 열어둔 베란다 문 앞에 준비해 두었다. 평소에 절대 안 사줄 것 같은 뜻밖의 선물을 안겨줘 감동을 더했다.


그 해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던 어느 날 S가 울면서 들어왔다.

“엄마, 산타 할아버지는 진짜 없는 거야? 글쎄 A가 너도 크면 알게 될 거라고 그러잖아.”

이런 동심파괴범이라니. 오빠가 있는 A는 일찌감치 비밀을 알아버렸고 또래보다 큰 아이처럼 굴었다. 하는 수 없이 난 사실대로 얘기해 줬고, S는 한동안 슬퍼했다.


더 큰 사건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포켓몬 스티커북 실종사건.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포켓몬 띠부씰 모으기. S도 포켓몬빵에 들어 있는 스티커를 바인더북에 하나둘 모으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A집에 놀러 갔다가 발견하게 된다. S는 당연히 내 거라고, 내 이름이 여기 적혀 있었는데 지워진 흔적이 있지 않느냐고 내놓으라고 했지만 Y는 자기 거라고 잡아뗀다. 둘이 다투다 A 엄마에게 물어보기로 한다. ‘엄마’라면 제대로 판정해 주리라 기대한 S의 마음과 다르게 그 엄마도 A 거가 맞다고 했단다. S는 많이 억울했지만 스티커북을 끝내 돌려받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A 엄마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A에게 터울이 있는 오빠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작은 아이에게 신경을 많이 못 쓰는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자기 아이 물건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 텐데 어떻게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딸이 기죽을까 봐 두둔해 준건지, 그 스티커북의 존재를 몰라 그저 딸 편을 든 건지… 상식적이지 않은 태도에 소름이 돋았다.




난 쫄보 엄마다. 10년 전 S랑 시애틀에 놀러 갔을 때도, 캐리어를 끌고 지나가는 우리에게 종이 뭉치인가를 던졌던 무례한 놈에게 한 마디도 못했다. 이건 인종 차별이라고,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분개하는 S의 팔을 조용히 잡아 끌 뿐이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처럼 용감하게, 어디 감히 우리에게 이러느냐고 무서운 표정이라도 지어 줬어야 했는데 딸보다 내가 더 쫄았다.


엄마가 되면 “누가 우리 애 때렸어? 나와!” 이렇게 저절로 큰소리치게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순둥이 우리 엄마가 그랬듯 나도 아이의 방어막이 되어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했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상황에도 나서지 않았다. 좋은 말로 우리가 참자고 했지만 가장 편한 방법인 ‘회피’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아이 마음이 제일 중요한데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별의별 사람을 경험한 지금의 나라면 A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이건 단순히 스티커북을 돌려받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A를 위해서라도 분명히 사실을 아셔야 한다고 조근조근 얘기했을 것이다. 그렇담 A도 자기 건 줄 착각했다거나, 너무 갖고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그랬던 것 같다고 솔직하게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일련의 사건들 이후, 우리 애는 진실을 밝힐 기회를 놓쳤고 어른에게 상처를 받았으며 친구를 잃었다. 많이 늦었지만 S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엄마가 부족했다고 고백했다.


그때 그 아이는 그 사건을 기억할까? 마음이 찔렸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까. 우리 애에게 미안한 마음이라도 갖고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혹시 일찍 결혼해서 아이가 있다면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억을 오래 간직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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