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포옹

언제까지고 기억할게

by 데이지

지난주에 브런치 글을 올리지 못했다. 카페에 앉아 몇 시간째 한 줄도 쓰지 못했다. Y 이야기 외에 다른 글을 쓸 수 없으리라는 걸 알기에 꾸역꾸역 문장들을 만들었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Y의 위암 진단 소식을 들은 건 지난해 11월 초였다.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하고 위 내시경도 받았지만, 보만 4형이라는 위암은 조기 발견이 어렵다 했다. Y는 수술을 원했지만 이미 전이가 많이 돼 있는 상태라 불가능했다. 몇 차례 항암을 진행하면서 기적을 바랐지만 4기까지 진행된 암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지난 연휴 때 Y의 부고를 받았다. 회갑을 이틀 앞두고 그렇게 훌쩍 가버리다니…. 한 번 더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Y는 다섯 명이 함께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 모임 멤버이다. 다른 친구들은 나랑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사실 난 Y를 잘 몰랐다. 내 친구들의 절친이라 자연스럽게 같이 만났고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됐다. 졸업한 뒤 다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Y 덕분에 우린 짬짬이 여행을 가곤 했다. Y가 결혼한 뒤 신혼집에 놀러 가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그러다 한창 페이스북에서 친구 찾기가 유행일 때, 다른 친구를 통해 극적으로 연결이 됐다.


Y가 전화했던 그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린 건너뛰었던 시간들을 두서없이 얘기했고, 난 그해 웬 바람이 불었는지 항아리에 매실청 담근 게 있어서 거르는 중이었다고 말했다.

“아니 일한다면서 언제 매실청까지 담갔대. 부지런하기도 하다!”

Y가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보여 살짝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난 Y야말로 얼마나 부지런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안다.


Y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본다. 스무 살 무렵,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운전면허를 딴 Y가 엄마 차를 빌려 우리를 태우고 드라이브를 해줬다. 운전하는 걸 좋아해서 남편이랑 이동할 때도 자기가 운전한다는 Y. 그때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신용카드를 턱 건넬 때, 별것도 아닌 그게 얼마나 멋있었는지 모른다. 40년 전인 그땐 여성 운전자도, 자가용도 많지 않던 시절이라 그랬을 것이다. 뭘 해도 자신감 있게 잘 해낼 것 같은 Y가 의외로 일찍 결혼하고 싶다고 말한 것도 그때였던 같다. Y는 그의 바람대로 또래보다 일찍 결혼했고, 아들 둘을 야무지게 키워냈다.


Y는 어려운 짐을 기꺼이 지는 친구다. 누군가를 도와야 할 때 결코 미적대지 않는다. 그 일이 어려운 줄 알고, 몸이 힘들어질 줄 알면서도 외면하지 못하는 친구다. 잔머리 따위 굴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기 앞에 놓인 그 일들을 해낸다. 제발 여우처럼 굴라고 해도, 못 한다고 안 한다고 얘기하라고 해도, 내가 해야지 하며 떠맡는 친구다. 작년 5월 오랜만에 친구들과 서울에서 호캉스 하던 날, 난 그의 인생사를 처음으로 듣고 놀랐다. 초등학교 시절 장사하는 엄마를 돕겠다고 매일 리어카를 밀었다는 얘기, 신혼 때 몸져누우신 아버지 병 수발을 몇 년간 했다는 얘기, 평생 엄마를 걱정하는 딸이었지만 외사랑이었다는 얘기…. 늘 괜찮은 줄 알았던 Y의 어깨에 그리도 많은 짐이 지워져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하지만 Y는 제 자신에게는 너무도 인색한 친구다. 파마를 자주 하지도 않으면서 그게 아깝다고 값싼 미장원을 수소문해 찾아가곤 했다. 혼자 있을 땐 집에 냉난방도 조명도 모두 ‘꺼짐’ 상태다. 한겨울에 Y집에 갔다가 얼마나 추웠던지, 우리 온다고 난방을 켰다는데도 바닥은 쉬이 데워지지 않았다. 아들이 명품 가방을 선물해 줬는데도 아까워서 못 들겠다고 다시 팔까 하길래 핀잔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시어머니한테 전화 오면 아, 용돈이 부족하시구나 하고 넉넉히 송금한다는 친구다.


Y는 우리 모임의 플래너이다. 해외에 사는 친구가 있어 자주 보진 못했지만 만날 때마다 이벤트가 있었던 건 Y 덕분이다. 매달 회비를 챙기는 총무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고, 어딜 가자, 뭘 하자, 계획하고 추진하는 건 늘 Y였다. 우린 그저 일정을 맞추고 명령(약간의 강압도 있다)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모두가 Y를 전적으로 의지했고, 언제까지고 우리 모임의 총무이자 회장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4월이었다. 이미 항암을 시작했지만 Y의 몸이 더 힘들어지기 전에 만나자고 추진한 모임이었다. 마침 해외에 사는 친구가 와 있어서 다섯 명 완전체로 만날 수 있을 때 보자 했다. Y는 내게 전화해 호텔 예약을 부탁했다. 두 개의 옵션을 주며 어떻게 일정을 짜는 게 좋을지 생각해서 결정해 달라 했다. 항암 중이라 손발이 저리고 눈두덩이가 찌르는 듯이 아프다는 애가, 어지럽고 구토가 심해서 입맛이 없다는 애가 전화까지 걸어와서 깜짝 놀랐다. 난 오래 생각하지 않고 Y네 집에서 가까운 호텔을 예약했다. Y가 제안한 다른 선택지도 좋았지만 차로 이동해야 하는 데다 많이 걸어야 하는 코스라서 아무래도 무리이지 싶었다. 호텔 바로 옆에 호수 공원도 있으니 Y의 컨디션이 좋으면 저녁 먹고 산책해도 좋을 것 같았다.


Y는 우리와 1박 2일을 함께 했다. 몸이 힘들면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했는데 다행히 참을 만하다 했다. Y는 우리가 간식으로 사 온 떡볶이도 맛보았고, 가족들이 말리는 탄수화물(빵)도 조금 먹었다. 우린 먹고 싶으면 뭐든 먹어도 된다고 Y를 부추겼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기분 좋게 와인도 한 잔 했다. 저녁 산책까지 함께 한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랐던 우린 그저 Y가 앞으로도 잘 버텨낼 것 같아 안도했다.


다음날, 헤어지는 시간이 아쉬웠지만 또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Y야, 자주 연락하지 못해 미안해.”

“괜찮아….”

아픈데 전화하면 괜찮을까,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할까, 괜히 눈물이라도 쏟아지면 낭패인데,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항암 소식을 듣고도 전화 한 번 못했다. 미안해하는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 Y가 나를 꼭 안아준다. 따뜻했다. 그게 친구와 나눈 마지막 포옹이었다.




“친구들의 기도와 사랑의 힘으로 나와 우리 가족들은 너무나 감사한 하루하루를 기적처럼 보내고 있어.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해.”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하며 기도를 부탁하던 Y의 카톡이 끊겼다. 6월 중순, 우리가 만난 지 불과 두 달 만이었다.

대신 Y의 남편이 간간이 상태를 전해주었다. 친구가 답하지 않는 카톡은 쓸쓸하기만 했다.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친구들은 기도하고 있다는 이모티콘만 조심스레 남겼다.


9월 어느 날, 유난히 Y가 보고 싶은 날이었다. 거실 창가, 작은 촉으로 받아 무성하게 커버린 나비란에 눈길이 갔다. Y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내 친구 Y아, 네가 준 나비란은 아직도 잘 자라고 있단다. 생각해 보니 난 너에게 늘 받기만 한 것 같아.

늘 품이 넉넉한 친구야. 유난히 네가 보고 싶은 날이다. 이 고비를 잘 넘기고 우리 만나자.”


병원에 계속 입원 중이라 가족 외에 면회가 안 된다 했다. 휠체어에 앉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어 1층 로비에서라도 만날 수 있기만을 바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찾아가 볼 걸. 친구들과 전화하면서 뒤늦은 후회만 했다.


추석 연휴 끝자락에 Y의 부고를 받았다. 장 천공도 사라지고, 위험하다던 패혈증도 이겨내고, 폐에 물이 차는 증세도 없어졌다는데, 극진히 간병하는 가족들을 위해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버텼는데 거기까지였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길을 떠난 친구를 조문하러 가는 길. 하늘은 유난히도 푸르렀다. Y가 저 하늘 어딘가에서 괜찮아, 이렇게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여전히 자기 자신보다 친구들을 걱정하고 있을 것만 같다.

사랑하는 친구야, 부디 편히 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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