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려볼까

애플펜슬, 반가워!

by 데이지

가끔 초등학교 교정에서 그림을 그리던 때가 생각난다. 5학년쯤이었을 것이다.

방과 후였던 것 같은데 친구 두어 명과 작은 이젤을 펼치고 제법 진지하게 양 손가락으로 구도를 잡으며 그렸던 것 같다. 아마도 어딘가 그림대회에 낼 작품이었던 듯싶다. 학교 건물을 배경으로 교정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스케치하고 두꺼운 붓으로 꾹꾹 찍어 초록색 이파리를 표현한다. 핵심은 같은 초록이어도 연초록, 진초록으로 다양한 색감을 줘야 한다는 것. 그때 난 매달 사는 어린이 잡지에 딸려오는 부록이 너무 좋았다. 그중에 색상 샘플처럼 부채처럼 펼쳐지는 물감종이가 있었다. 신기한 건 두꺼운 종이에 색색깔 물감이 발라져 있어 물만 묻히면 바로 채색할 수 있었다. 문방구에서 쉽게 살 수 없는 것이라, 친구들은 없는 희귀한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신났던 것 같다.

그날이 지금도 기억나는 건, 지나가던 선생님이 내 그림을 칭찬했기 때문이다.

“나무를 아주 잘 그렸네. 나중에 전공해도 되겠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칭찬을 받아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무렵 꽤 재미있게 그림을 그렸던 기억은 있다.

사실 나는 내 한계를 잘 알았다. 정물화나 풍경화는 잘 그리는데 상상해서 그리는 그림은 영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땐 유독 그런 주제들이 많았다. 멸공, 불조심 같은 포스터나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 이런 그림 말이다. 상상력이 부족한 건지, 사물을 집중해서 보지 않아서인지, 아무튼 그냥 그림을 그려보라 하면 막막한 게 영 자신 없었다.


그럭저럭 그리던 내 그림이 좋은 평가를 받은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미술 선생님은 특이하게 컴퍼스와 자로 면을 잘게 분할해 조화롭게 채색하라고 주문했다. 사실 그림 실력보다는 인내와 끈기였을텐데 구도가 괜찮았는지 내 그림은 그럴듯한 액자에 담겨 교무실로 가는 복도에 걸렸다. 졸업하는 날, 하나뿐인 내 작품과 이별하는 게 아쉬웠다.


그 후로 내 그림 솜씨는 아이들 키울 때 간간이 빛을 냈다. 동네 문화센터에서 십자수를 배웠을 땐 아이들 흰색 면 티에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 밑그림을 그려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주었고, 크리스마스 땐 그림책 속 주인공을 카드에 그려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사실 아이들보다 내가 더 행복했던 것 같다. 그렇게 오랜만에 뭔가를 그리고 완성하는 과정이 좋았다.




오로지 아이들 키우는 데 전념했던 30대를 보내고 뒤늦게 취업했다. 그리고 꼬박 14년간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살았다. 오로지 일 중심, 나는 없는 하루들이었다. 몇 년 간의 고민 끝에 퇴직을 결심하고 천천히 나를 돌아볼 셈이었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복병을 만났다. 퇴직하자마자 칩거의 생활이 이어졌다. 매일 바쁘게 움직이던 내게 집에만 있는 건 고역이었다.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애플펜슬을 떠올렸다. 딸아이가 선물한 아이패드엔 애플펜슬이 딸려 있었는데 메모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 별로 쓰지 않고 있었다. 그때도 딸이 부추겼던 같다.

엄마, 그림을 그려봐, 엄마 그림 잘 그리잖아. 애플펜슬로 그림 그리는 앱이 있어…. 그렇게 얘기해 줬던 것 같다.

생소한 애플펜슬로 뭘 그릴까 고민할 무렵, 우연히 인스타에서 라면회사의 일력을 보고 저거다 싶었다. 몇 명의 일러스트 작가들이 참여한 일력, 어딘가에 라면이 그려져 있는 귀여운 그림들은 꼬물꼬물 뭔가를 그리고 싶은 내게 딱이었다. 라면이 먹고 싶은 부작용이 있지만 너무도 유용했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매일 따라 그렸다. 이사를 앞둔 때는 하는 수 없이 버려야 하지만 기억하고 싶은 물건들을 그리기도 했다. 아이들이 재미있게 갖고 놀던 피코, 딸아이가 선물해 준 지갑이랑 컴퓨터 손목 패드, 애착 인형 같은 것들…. 매일 한 그림씩 느리지만 꾸준하게, 마치 나만의 일력을 만들 듯 그림을 그렸다. 아들 녀석이 이것 말고 이모티콘을 그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해서 우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고유한 캐릭터가 있어야 하므로 먼 길일 터였다. 평온한 하루를 마무리하듯 매일 그림 한 편을 완성하는 건 꽤나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해 2021년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예측하지 못한 변수들은 나의 일상을 흔들었고 무너진 루틴은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전 ‘다시’ 애플펜슬이 생겼다. 한동안 무용했던 애플펜슬을 딸아이가 빌려가더니 아예 새것으로 사준 것이다. 새로 생긴 펜슬이 그 쓸모를 다하려면 당연히 뭔가를 해야 한다. 열심히 책을 읽으며 메모를 하거나, 꼬물꼬물 뭔가를 그리거나. 그래서 올해는 다시 그림을 그려볼까 싶다. 거창하진 않다. 그때처럼 매일 그릴 자신도 없다. 내 브런치 글에 덧붙여지는 무료 이미지 사진이 아쉬울 때, 앵글에 다 담기는 사진 말고 딱 어떤 부분만 강조하고 싶을 때, 그럴 때 조금씩 그려봐야겠다.

그나저나 다 까먹었을 테니 그림 그리는 툴부터 다시 공부해야 할 것 같다. 레이어를 어떻게 쌓아가더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전한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