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란 무엇일까
영업시간을 확인하지 않고 집을 나선 게 낭패였다. 평일 같으면 새벽 6시 30분부터 문을 여는 스타벅스. 아이패드를 챙겨 들고 7시쯤 집을 나와 동생이랑 통화를 하며 걷는다.
- 연휴 때 이렇게 일찍 문 여는 카페가 있어?
- 당연하지. 스타벅스는 늘 일찍 열어.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니 8시 오픈. 집 주변을 산책하며 기다리기엔 긴 시간이다. 하는 수 없이 집에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아, 명절은 명절이구나.
본격적인 설날 연휴가 시작됐는데 우리 집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다. 요양원에 계신 엄마에겐 지난주에 미리 다녀왔으니 갈 데도 없다. 설날과 어울리는 음식 몇 가지를 만들어 먹는 것 외에 특별히 할 일도 없다. 영화나 볼까 싶어서 설날 오전 시각으로 <폭풍의 언덕>을 예매했는데 굳이 미리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자리가 텅텅 비어 있다. 설날 특수를 누리던 영화관도 예전 같지 않은 모양이다.
수영장은 설 연휴 동안 월화수 3일만 쉰다. 그래서 토요일, 일요일 연이어 수영 연습을 하고 왔다. 명절이라 다들 어디 갔으려니 했는데 생각보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반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수영 안 하고 풀에서 노닥거리면 안전 담당 선생님한테 혼나는지라 눈치를 보며 수다를 떤다.
- 아니, 야들은 설날 당일에 오래니께 왜 일찍 온댜? 아이고 이제 해 멕이기도 귀찮아.
- 딱 여기까지 좋았는데, 수영장 문을 나서면 할 일이 산더미예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요.
-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형제들이 각자 명절을 지내기로 했어요. 이제 좀 편해졌어요.
- 으윽 삼시세끼, 이미 지옥의 맛을 보는 중이야. 살아서 만나자고….
- 식구들이 없으니까 좀 허전한 기분도 들어요. 이번에 형님네가 오신다니 반가운 마음마저 들더라고요.
명절의 스트레스는 여전하지만 아주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들이 보인다. ‘민족 대이동’ 같은 수식어도 뉴스에서나 관행처럼 쓸 뿐, 예전 같지 않다. 아마도 우리같이 ‘끼인’ 세대, ‘과도기’ 세대가 지나가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그저 우리 세대가 시대의 흐름에 맞춰 하나둘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뜬금없이 그날이 떠오른 건 왜일까. 1979년이었을 것이다. 겨울 날씨 답지 않게 따스했던 날, 잔칫집처럼 시골집 마당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당 평상에선 동네 아줌마들이 솥뚜껑을 뒤집어 돼지기름을 칙 바른 다음 지글지글 전을 부치고 있었고, 앰프에선 민요인지 트로트인지 노랫가락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모처럼 거위도 닭들도 날뛰지 않는 마당을 편안히 누비며 자잘한 심부름을 했다. 이번 잔치를 위해 커다란 돼지 한 마디를 잡았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한평생 한량처럼 사셨던 할아버지의 첫제사 풍경이었다.
바로 1년 전,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가 급히 내려갔으나 임종을 보지 못했다. 큰 고비를 넘기셨기에 괜찮아지실 줄 알고 서울행 열차를 탔으나, 할아버지는 큰 아들이 떠나자마자 눈을 감으셨다. 아마도 육십 대 중반이셨을 텐데 그때만 해도 다들 호상이라 했다. 술 좋아하시던 분이라 아침만 드시면 주막으로 향하셨다는데 그런 분 치고 오래 자리보전하지는 않으셨던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부디 좋은 데 가시길, 자손들도 무탈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첫제사를 그리 정성껏 바쳤을 텐데, 몇 달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사업은 몰락했다. 그래도 큰아들 잘 살 때 돌아가셨다고 다들 할아버지가 복이 많은 분이라고들 했지만, 나는 원망스럽기만 했다.
할아버지의 무능은 평생 아버지를 가장의 무게에 짓눌리게 했다. 잦은 병치레로 골골대는 할머니를 챙기는 건 어쩔 수 없다 해도, 그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줄줄이 다섯이나 되는 형제들을 건사하는 건 가혹했다. 다들 형을 따라 상경했고 아버지는 그런 동생들을 살뜰히 챙겨 하나둘 결혼시켰다. 그러나 아버지 사업이 잘못되자 배은망덕하게도 형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엄살을 떠는 이들도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난 어른답지 않은 어른이 있다는 걸 일찍 깨달았다.
훗날 오빠가 아버지 사업을 다시 시작하고 보란 듯이 재기하자, 소원했던 작은 아버지들이 하나둘 모습을 비추었다. 대책 없이 당당하게 굴었던 아버지 때와 다르게 이번엔 ‘가련’ 모드로 전략을 바꿨다. 명절을 쇠야 하는데 돈이 없구나, 몸이 안 좋다…. 마음 약한 오빠는 조용히 작은 아버지들을 챙겼다. 사업이 잘 나간다 싶었는데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겠다고 선포해 버린다. 오빠가 어떤 심정으로 그 힘든 결정을 했는지, 복잡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떠나야 할 수십 가지 이유 중에 ‘장손’이라는 무게가 있을 것이라는 건 짐작한다.
미국이든 어디든 이민을 갔으면 좋겠다, 제발 형제들이 뚝뚝 떨어져 살았으면 좋겠다, 너는 식구들 별로 없는 집으로 시집가라….
육 형제의 맏며느리 노릇이 버거웠던 엄마는 그렇게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살기를 꿈꿨으나, 안타깝게도 엄마의 바람은 당신 자식들 대에야 모두 이루어졌다. 그래서 엄마의 노후는 되레 쓸쓸해졌다. 엄마는 아들들이 없는 명절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내 자식들 입에 들어가지도 않는 음식을 차리는 게 무슨 흥이 있겠냐며 토로하곤 했다. 그리고 어느 해, 결심한 듯 명절을 지내지 않겠다고 작은 아버지들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선언했다. 모두들, 형수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싫은 소리를 했으나 엄마에겐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들을 만날수록 아들들의 부재가 선명해졌으므로. 그렇게 엄마는 맏이의 노릇을 끝냈다. 늘 그렇듯 아빠 대신 악역을 맡았고, 그땐 아버지도 말없이 수긍했다.
가끔 생각한다. 엄마의 단호함에 대해. 어쩌면 그건 할 만큼 했다는 당당함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 말도 마라. 네 오빠랑 너, 작은아버지들까지 단칸방에서 한 이불 덮고 자던 때도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고마웠다고, 애쓰셨다고, 형님 형수님 덕분에 이만큼 산다는 말을 들었으면 엄마의 마음이 좀 풀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엄마 아빠에게 가족이란, 형제란 그런 베품이 당연한 관계였고, 벗어날 수 없는 무한 책임의 굴레였을 뿐이었다. 그것도 당신들이 되돌려 받을 수 없는 일방적인….
설날 연휴, 옛 생각에 진지해졌다. 과연 우리 시대의 가족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각자도생이 정답일 터. 해준 것도 없는 아이들에게 최소한 짐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백수 생활이 길어질수록 얄팍해지는 주머니가 불안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