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해도 좋아
가끔 만나는 친구들이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여행을 자주 다니냐고. 자유로운 인생이라고. 모아 둔 돈이 많거나 연금이 두둑한 모양이라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건 맞는데 후자는 아니다. 그저 삶의 우선순위가 남들과 다를 뿐이고, 특별하게는 여행을 좋아하는 딸 S를 둔 덕분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못 믿겠다는 눈치다. ‘그렇게 쓰다간 돈 못 모으지,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오지랖 넓은 친구는 진심 어린 걱정을 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겐 비용이고 지출뿐인 여행이 나는 왜 좋을까. 나이 들수록 비행기 타는 게 힘들고 체력이 달린다는데 나는 왜 여전히 설렐까.
그건 아마도 S와 함께 하면서 축적된 우리만의 여행 스타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여행은 ‘쉼‘이다. 공간 이동 하듯 일상의 공간에서 천천히 새로운 도시로 안착한 다음, 시간에 쫓기지 않는 하루를 만든다.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는 데 비행기 값이 얼만데, 이 호텔이 1박에 얼만데, 이왕 왔는데 뽕을 뽑아야지…. 이런 생각을 절대 하지 않는다. 가볼 만한 곳을 다 둘러보지 못해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쇼핑하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일상으로 돌아가 여행이 준 에너지로 열심히 살고, 다가올 여행을 기다린다. 그리고 문득 여행지의 한 순간이 떠오르면 함께 공유하며 즐거워한다.
타이난에서 가오슝까지는 기차로 이동했다. 두 곳의 숙소를 기차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잡은 건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토요일이라 우리가 원하는 시각에 타지 못할까 싶어 아침 일찍 타이난 역에 가서 기차표를 사뒀고, 이동하는 동안 지치지 않게 조식도 든든히 먹었다. 떠나가는 마음엔 늘 아쉬움이 달라붙는다. 10년 전, S가 걸었던 거리, 캠퍼스, 자주 갔던 식당, 과일 가게…. 불투명한 미래에도 중국어를 공부하겠다고 선택한 어린 S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때 함께 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볼 수 있어서 좋았어. 고마웠어, 타이난!’
가오슝은 타이난과 또 따른 모습이다. 일단 지하철이 있어 이동하기 편하다는 게 장점. 하지만 기온이 올라가서인지 덥다. 주말이라 거리엔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많다.
가오슝에선 2박만 머물고 떠날 예정이라 시간이 촉박하다. 우린 보얼예술지구와 가오슝시립미술관, 용호탑, 리우허 야시장 등을 둘러보았다. 일정상 다카오 영국영사관의 애프터눈 티는 포기했지만 하이즈빙의 망고 빙수를 먹으러 갔고, 마지막날 저녁 식사는 주변 맛집 Old New Taiwanese Cuisine에서 함께 했다.
이 중에서도 내 마음에 드는 공간은 보얼예술지구. 타이베이의 쑹산 문화창의공원과 비슷한 공간이다. 타이완 최초의 담배공장을 재생한 공간이 쑹산이라면, 보얼예술지구는 항만 창고를 재생한 문화복합공간이다. 보얼은 Pier 2라는 뜻. 오래된 공장을 허물어 버리지 않고 문화전시 공간으로 되살리는 대만의 도시재생 정책이 부럽기만 하다. 입구 쪽 춘수당에서 가볍게 요기를 한 다음, 천천히 둘러보기로 한다. 세월의 더께에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더해져 공간이 활기를 띠는 듯하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공간들을 걷다 보면 시원하게 트인 바다가 보인다. 저 멀리엔 전혀 다른 풍경의 고층 빌딩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슬슬 다리도 아파 온다.
“저긴 바(Bar) 같은데? 이 다리를 건넌다는 건 저기 앉아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먹겠다는 거야. 어때, 오케이?”
여행지에서 낮술을 즐기는 나는 생떼를 부리고, 못 이기는 척 동행들도 오케이 한다.
한 줄기 바람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해 주고, 알코울 몇 방울이 기분을 좋게 한다. 에너지를 충전했으니 이번엔 펑리수 맛집 ‘써니 힐’로 이동. 어차피 선물용으로 몇 개 구매할 계획이니 시식용 펑리수와 따뜻한 차 한 잔도 먹기로 한다. 주변 잔디밭엔 어린이를 위한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이고 푸드 코너에선 맛있는 냄새가 풍긴다. 대기하는 동안 나도 주말 인파에 휩쓸려 본다. 20여 년 전, 우리 가족이 자주 갔던 호수 공원이 떠오른다. 배드민턴을 치고 공 놀이를 하고 자전거를 탔던….
여행은 이렇게 아스라한 추억을 불러들인다. 힘든 때도 많았을 텐데 다행히 좋은 기억들만 떠오른다. 가오슝의 오늘도 어느 날 문득 되새겨지겠지? 저물어가는 해처럼 짧은 일정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