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음식을 마주할 때 특정 장소가 떠오르곤 한다. 아버지가 투병 중에 자주 드셨던 육회를 볼 때마다 2018년 가을 프라하가 생각났다. 아버진 암덩어리들이 목구멍을 죄어오자 부드럽게 넘어가는 육회를 찾으셨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당신의 의지가 높았던 시기였다. 아버지의 간절함과 달리, 나는 갑자기 닥친 간병의 시간들에서 탈출하고 싶을 때마다 동유럽의 도시들을 떠올렸다.
# 체코식 육회, 타르타르
댄싱하우스에서 버스를 타고 S가 추천한 맛집에 가기로 했다. 동선 상 ‘페트린 타워’에 가기 전에 들르면 될 것 같았다. 식당에 도착해 대표메뉴 타르타르(tatarak)를 주문할 때만 해도 아무거나 잘 먹는 난 자신 있었다. 그런데 플레이팅이 낯설었다. 참기름이 좌르르 흘러 식욕을 돋우는 우리식 육회와는 전혀 달랐다. 동그랗게 뭉친 큰 고깃덩이와 몇 가지 소스, 그리고 잘게 다진 양파가 전부였다. 문제는 고기를 잘 먹는 J는 육회를 안 좋아하고, 육회를 곧잘 먹는 나는 고기 양이 적다는 것이었다. 잘 구워진 빵에 생마늘을 문지르고 소스를 묻힌 생고기를 발라 한 입. 음.. 나쁘지 않아. 하지만 빵과 고기만의 조합은 곧 물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타르타르와 잘 어울리는 메뉴를 시켰어야 했는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 날 첫 끼니는 실패했다.
S에게 생각보다 맛도 별로였고 식당 위치도 한적한 공원 입구에 있더라고 얘기했더니 아니란다. 아뿔싸. 다시 Zahradni Restaurace을 검색해 보니 정원(Zahradni) 이름이 붙은 식당이 여러 군데였다. 어쩐지, 식사 시간이 지났긴 해도 맛집 치고는 사람이 너무 없다 싶었다. 혹시 다른 집 타르타르였다면 좀 더 잘 먹었을까, 예상치 못한 비주얼 때문에 선입견이 있었던 건 아닐까, 아직 여독이 가시지 않았던 때라 못 먹었던 게 아닐까. 다시 한번 더 도전해 보고 싶은 음식 리스트에 체코식 육회, 타르타르를 올려 본다.
# 페트린 타워
본격 여행 1일차 마지막 장소는 페트린 전망대. 프라하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레스토랑에서 트램을 타고 페트린에 오를 수 있는 정류장에 잘 내렸다.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니 드넓은 공원이 펼쳐져 있다. 단체 여행객들의 인파를 헤치며 가능한 한 빨리 페트린 타워에 오르기로 했다. 타워 1층,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 거냐고 묻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패스로는 안 되고 따로 돈을 내야 한단다. 뭐, 계단 몇 개나 된다고. 그냥 오르자.
수시로 꺾어지는 좁은 계단을 무려 299칸이나 올라가야 끝내주는 전망을 볼 수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파리의 에펠탑을 5분의 1 크기로 축소한 규모라는데 우리에겐 끝이 보이지 않았다. 둘 다 저질 체력이라는 게 팩트인데 무슨 객기를 부린 걸까.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직관적으로 판단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오를 때마다 시야가 넓어지는 프라하 시내의 풍광도 뒷전이었다. 좁디좁은 계단에서 쉴 때마다 “파이팅!”을 외치는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지만, 하늘빛이 노래지는 걸 체험했다. 그 뒤로 우린 타워 울렁증에 걸렸다. 무조건 엘리베이터를 선호했고, 계단밖에 없으면 깔끔하게 전망을 포기했다.
그래도 기념사진은 찍어야지. 페트린 타워 등반에 성공한 뒤 프라하 시내를 배경으로 한 사진을 찍었다. 그제야 미소가 지어진다. 아니, 이렇게 올려다보면 별거 아닐 것 같은데 우리만 힘들었던 거야? 그렇게 기나긴 하루 일정이 끝났다. 어느새 인파는 빠져나가고 넓디넓은 공원에 석양이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