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이지 Mar 23. 2023

요양원에서 보낸 봄여름가을겨울

엄마의 1년

“우리 딸이네.”

전화기 속 나를 보며 엄마가 웃는다. 오늘은 컨디션이 괜찮으신 모양이다.  


엄마가 요양원에 가신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작년 이맘때, 오빠가 캐나다로 돌아가는 일정에 맞춰 요양원 입소일을 정했다. 공교롭게도 음력 생신 다음날이었다. 사실 그동안 엄만 음력 날짜도 아니고 양력 생신도 아닌 3월 1일을 당신 생일로 쇠자고 하셨다. 순전히 자식들이 오기 편한 공휴일이라는 이유로.


여든다섯 번째 맞는 엄마의 생신. 어쩌면 자식들이 차려드리는 마지막 생신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특별히 유난스럽게 차리지 말자고 했다. 드라마나 영화 속 한 장면이 되기 싫었다. 누군가와 헤어져야 할 때, 아이를 고아원에 맡길 때, 가족들은 마지막이라며 꼭 근사한 밥을 먹이곤 하지 않나. 사정을 모르는 당사자는 마냥 좋아하고, 결말을 아는 가족은 밥 숟가락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어색한 장면. 그렇게 온탕과 냉탕을 오가지 않도록, 더 슬픈 마음이 들지 않도록, 그저 여느 해와 다르지 않은 정도로 생신상을 준비하자고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연기하는 건 어려웠다. 자꾸만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눈치 빠른 엄마가 무슨 일이 있다고 느끼실까 봐 두려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린아이처럼 나랑 같이 자자고 하는 엄마 옆에 누워 ‘내일’을 걱정했다. 한 번은 맞닥뜨려야 하는 이별의 순간을 떠올리느라 잠을 설쳤다.

약속된 ‘그날’, 엄마와 헤어지던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대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엄마를 맡기는 걸까. 이렇게 서류만 제출하면 모든 절차가 끝나는 건가. 요양사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엄마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나는 엄마, 미안해요..​ 글을 쓰며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당신이 요양원에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엄마. 얘들이 왜 나를 여기에 두고 가느냐고 따질 법도 한데 엄마는 낮게 중얼거리기만 했다.

“뭔 소리냐… 뭔 소리다냐….”

아이처럼 울 수도 없는 엄마, 이럴 수 없다고 통곡할 수도 없는 엄마의 그 마음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중학교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우리 가족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번듯한 2층짜리 양옥집에 살던 우리는 졸지에 단칸방으로 내몰렸다. 아버지는 종적을 감췄고, 동생들은 잠시 고모네집에 가 있었다. 유일한 동아줄이자 화수분으로 여기며 아버지 옆에서 기생하던 누군가는 혹시나 꿍쳐 둔 돈이 있지 않을까 엄마를 못 살게 굴었다. 살아갈 일이 막막한 엄마에게 그들은 위로 대신 비수를 날렸다.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하며 뒤척이던 밤, 난 엄마가 말없이 울먹이다 통곡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엄마는 약한 사람이 아니므로 그러고도 잘 되나 보자고 원망하는 소리까지 이어져야 그 슬픈 순간들이 끝났다. 그리고 엄마는 다시 일어섰다. 어떻게든 어린 자식들을 키워내야 했기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엄마는 파란만장한 그 인생을 어떻게 헤치며 살아오신 걸까. 이제 좀 편히 지내실 만한데 엄마는 어쩌다 기억을 잃으셨을까.

지난 1년간 요양원의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매일 영감을 부르고 식구들을 찾았다는 엄마. 여기 주소를 잘 모를 거라고 가봐야 한다고 출입문 앞에 서성이던 엄마. 당신의 스카프로 보따리를 싸곤 집에 가야겠다고 나서던 엄마.

요즘에야 엄마가 안정을 찾으신 것 같다. 한동안 이사 갈 거라고 하셨는데 요양원 원장이 여기가 집이라고, 어르신 집 팔고 여기를 산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러냐고, 잘했다고 하셨단다. 이사 얘기를 수백 번 반복하셨을 텐데, 지혜롭게 엄마를 설득한 덕에 마음이 편해지신 것 같다.


요양원의 사계절은 어떤 모습일까. 집에서 가까운 데 모셔야 자주 들여다볼 수 있다는 편의성 때문에 소규모 요양원들은 대체로 상가 건물에 있다. 창문으로 보이는 건 아파트 숲. 비나 눈이 내려야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까운 공원으로 산책을 나갈 수도 없는 환경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람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했지만,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들에게는 더없이 가혹한 시간들이었다. 보고 싶은 가족들과의 면회가 제한됐고 감염 위험이 높다는 이유로 외부 세계와 철저히 차단됐다. 코로나의 한복판에서 엄마의 ‘봄여름가을겨울’이 흘러갔다.


엄마, 잘 버텨 주셔서 감사해요. 평소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던 그 마음 덕분이에요.

통화한 김에 잠깐 원장이랑 엄마 상태에 대해 얘기 나눴더니 금세 엄마 표정이 굳어진다. 무표정한 엄마 얼굴을 보니 당신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시는 눈치다. 밝게 웃으시며 전화해 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실 때와 표정이 판이하다. 엄마의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표시다. 이제 통화를 마쳐야 할 때.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기 쑥스러워 엄마에게 넘긴다.

“엄마, 사랑한다고 얘기 안 하세요?”

그랬더니 엄마가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신다. 나도 엄마에게 사랑을 전한다.


엄마, 우리 사랑한다는 얘기 잘 안 하던 모녀였던 것 아세요? 이제 자주 하자고요. 부디 건강하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고, 조카가 왔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