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이지 Mar 28. 2023

다시 피아노 앞에 앉다

찾았다, 재밌는 일!

처음 피아노를 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인 것 같다. 70년대 초, 그때 피아노를 배운다는 건, 피아노 있는 선생님 댁에 가서 레슨을 받는 거였다.

첫 번째 피아노 선생님은 아기 엄마였다. 선생님과 나란히 피아노 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친다. 그런데 선생님이 자꾸만 꾸벅꾸벅 존다. 어느 땐 뒤로 고개가 젖혀질 만큼. 아마도 밤새 아이가 보챘나 보다. 철없는 난 엄마에게 이 사실을 일렀고, 두 번째 피아노 선생님을 만났다.


그 선생님과의 추억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대학생이고 교회 아동부 교사이기도 한 선생님은 나를 교회로 이끌었다. 크리스마스 땐, 선생님이 디자인한 맞춤 드레스를 입고 친구들과 공연을 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만능 연출가 같았다. 게다가 선생님 엄마는 더없이 친절하신 분이었고, 맛있는 간식도 만들어 주셨다. 난 따뜻한 분위기의 선생님 집이 좋아 오래 머물렀다. 다른 친구들과 작은 마당에서 소꿉장난을 하고, 꽃잎을 으깨어 그림을 그리던 기억이 난다. 피아노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던 나날들이었다.


러던 어느 날, 선생님 집 앞에 커다란 등이 걸렸다. 모르는 어른들이 나중에 오라며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

피아노를 배워야 하는데, 선생님을 만나야 하는데….

어스름한 저녁으로 기억하는 걸 보니 내가 몇 번이나 찾아갔었나 보다. 선생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거였다. 선생님은 레슨을 그만두었다.


난 다른 선생님한테 피아노를 배우기 싫었다. 그 선생님이어야 했다. 얼마 후 엄마가 집에 까만색 영창피아노를 들여놨다. 아마도 큰맘 먹고 사셨을 것이다. 그 선생님이 우리집에 와서 피아노를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오래 하지 못했다. 멀리 이사 가신다고 했다. 그땐 알 수 없었지만, 가장으로서 더 나은 돈벌이를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내게 선생님이 없더라도 어린이예배에 꼭 참석하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난 맹랑하게도 집에서 기도하겠다며 가지 않았다. 슬픈 마음뿐이었다.


집에 피아노가 생기니 더 이상 피아노가 재미있지 않았다. 선생님이 집으로 오셔서 가르쳐 주시니 더 편한데도 말이다. 그 뒤로 몇 분의 선생님들을 만났지만, 내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집에 온 손님들 피아노 한번 쳐보라는 얘기도 듣기 싫었다. 아마도 느릿느릿 <체르니 50번>에 들어가고 그만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아슬아슬하던 아버지 사업이 기울어 하루아침에 단칸방으로 내몰렸다. 모든 세간을 정리해야 했지만 엄마는 피아노만은 팔지 않았다. 외삼촌 댁에 맡긴다 하셨다. 아마도 다시 일어서면 가져오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음악시간. 각자 자신 있는 악기로 한 곡을 연주하는 게 수행평가였다. 리코더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외삼촌 댁에 들러 피아노를 연습했다. 오랜만에 <엘리제를 위하여>를 치는데 슬픈 마음이 밀려왔다. 그리고 피아노는 다시 우리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코로나와 함께 퇴직을 맞았다.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답답한 날들이었다. 어느 날, 소파에 앉아 있는데 전자피아노에 눈길이 갔다. 딸이 서울로 떠난 뒤론 그렇게 덩그러니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나같이 금방 싫증 낼 줄 알고 딸에게 피아노 대신 전자피아노를 사줬는데 딸은 피아노 치는 걸 참 좋아했다.

이참에 나도 피아노를 한번 쳐볼까?


그렇게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딸이 처음 배웠던 교재부터 시작했다. 처음엔 더듬더듬 건반을 뚱땅거리다 헤드폰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마음 편히 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없지만 예전의 기억을 되살리고 유튜브 영상을 참고하며 진도를 나갔다.

찾았다, 재밌는 일!


한 곡을 동그라미 쳐가며 열 번씩 연습하지 않아도 되고, 맘에 안 드는 곡은 건너뛰어도 된다. 교재에 연연하지 않는다. 연습시간도 구애받지 않는다. 1시간을 쳐도 되고 10분을 쳐도 된다. 그렇게 매일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 피아노가 좌뇌와 우뇌를 고루 단련시킨다니 얼마나 좋은가.

어려운 곡을 만날 때면 슬럼프가 오기도 하지만, 새로운 곡에 도전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배우는 자, 젊어지리니… 주문도 걸어본다.


오늘도 블라인드를 걷고 아침 햇살을 받으며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리고 반듯한 자세로 레슨 선생님 댁 피아노 앞에서 열심히 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가워. 그리고 고마워!

매거진의 이전글 덕질이라 해도 좋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