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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May 22. 2023

치매마저 잊게 만드는 막둥이 사랑

엄마의 진심을 읽다

“원장님, 미국에 사는 남동생이 엄마 뵈러 와요. ‘서프라이즈’니까 원장님만 알고 계세요.”

엄마에게 미리 말씀드리면 “누가 온다고 했지?”라고 하루에도 수백 번 물으실 것 같아 요양원 원장에게만 귀띔해 두었다.

엄마가 과연 막내를 알아보실까. 영상통화 속 화면을 보여드리면 매번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직접 만나면 기억하실까. 머리가 하얗게 센 오빠는 동생이라고 알아보시면서 왜 당신이 가장 예뻐한 아들은 낯설어하실까.


막내 동생은 우량아로 태어났다. 당시, 정상 체중을 넘는 ‘우량아’란 집안 형편이 괜찮다는 상징이기도 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우량아 선발대회>가 있던 시절이었다. 노산이라 했지만 당시 엄마 나이 서른셋이었다. 동생이 태어난 후, 엄마는 동네에서 ‘돼지 엄마’로 불렸다.

의자에 꽉 끼인 듯 앉아 있는 동생의  백일사진은 내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 단 한 장의 사진도 없는 나와 달리, 무려 금반지까지 끼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이라니. 게다가 막내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양장점에서 맞춘 옷을 입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짙은 그린 계열 멜빵바지.


보리밥밖에 못 먹던 시절에 태어난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엄마는 잔병치레를 하는 나를 볼 때마다, 입덧할 때 보리 냄새도 맡기 싫어 제대로 밥을 못 먹었기 때문이라고 미안해하셨다. 그래도 엄마는 사남매가 다들 복덩이라고, 너희들 낳을 때마다 살림이 점점 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막내는 엄마에게 딸 같은 아들이었다. 영업직에 있을 땐 일부러 시간을 내 엄마와 점심을 함께 하곤 했다. 대학생 엄마랑 영화도 보고 경양식 집에 간 적도 있단다. 그러고 보니 나도 엄마와의 추억이 있다. 대학교 축제 때였다. 부모님을 위한 공연이 있다고 해서 엄마를 모시고 갔다. 엄마는 즐거우셨는지 그때 따라 불렀던 ‘진주난봉가‘(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3년 만에…로 시작한다) 얘기를 여러 번 하셨다. 그날 학교 앞 경양식 집에서, 고작 돈가스 메뉴를 놓고 당신은 배 안 고프다고 하나만 시키자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동생이 대학생 땐 살림이 폈으니 그러시진 않았겠지.


그러나 다들 품 안의 자식이었다. 오빠에 이어 막내마저 이민을 결정하고 떠난 뒤, 엄마는 많이 힘들어하셨다. 잠들 때마다 베갯잇에 눈물을 적신다는 얘기를 하셨지만 난 못 들은 척했다.

엄마는 언젠가 당신도 미국에 가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갑자기 영어를 배우시겠다고 노인학교에 등록하기도 했다. 워낙 영민하시니 인사말이라도 배우시면 좋겠다 싶었다. 그러나 난 단 한 번도 엄마의 희망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인네가 미국에 가면 말도 못 하고 어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어 외로울 거라고, 뭐하러 감옥살이를 하려 하느냐고 말렸다.


기다림이 길어서였을까. 늙어 죽을 때까지 한국에서 살겠다는 아버지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인지, 미국에서 살아내느라 고생하는 막내에게 당신이 짐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미국 가서 살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몇 차례 아들들 얼굴 보러 다녀오시더니 “아이고, 이제 늙어서 비행기도 못 타겠다. 힘들다”고만 하셨다.


미국 이민은 사실 엄마의 로망이었다. 잘 나가던 아버지 사업이 실패한 후 살 길이 막막하자 엄마는 이 나라를 뜨고 싶어 했다. 같은 동네 살던 누구네가 이민 가서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신 뒤부터 미국으로 가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당신의 바람은 아들 세대에 이루어졌다.


2남 2녀 중 두 딸이 당신 곁에 있는데도 그렇게 허전하셨던 걸까. 감정 표현을 거의 안 하시는 분이라 우리는 엄마의 쓸쓸함을 몰랐다. 아무리 맛있는 식당에 모시고 가도, 막내랑 온 적 있다는 얘기만 하실 뿐 우리와 함께 갔던 건 기억하지 않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당신은 남녀 차별 하지 않고 사남매를 키웠다 하셨지만, 뿌리 깊은 ‘아들 선호’는 어쩔 수 없다고 엄마를 비난했다. 당시만 해도 엄마에게 ‘치매’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져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어떻게 딸들이 챙겨드린 건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느냐고 섭섭해하기만 했다.




엄마에게 각별한 막둥이가 오기로 한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가 요양원에 가신 뒤에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찾아뵙지 못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까.

그런데 미국에서 출발하기 전날 엄마가 낙상하셨다는 소식을 전해야 했다. 막내는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향했다.

“네가 어쩐 일이냐?”

“엄마, 제가 누군 줄 아시겠어요?”

엄마를 만나기 전, 막내는 엄마가 자기를 단박에 알아봐도, 알아보지 못해도 가슴이 아플 것 같다고 말했었다.

“누구긴, ○○○이지.”

아,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당신 동생 이름을 댔다.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 가까이 됐는데도 엄마에게 여전히 그리운 사람인가 보다.

첫 만남에서 엄마는 막내를 알아보지 못했다.  


엄마의 힘든 수술이 끝났다. 중환자실에서 회복하고 계실 때 막내는 다시 엄마와 대화를 시도한다.

“엄마, 저 모르시겠어요? 막둥이잖아요.”

“그래, 너구나.”

“근데 엄마 결혼 안 하셨다면서?”

“했어.”

치매를 앓는 분 같지 않게 엄마가 너무도 멀쩡하게 말씀을 잘하시더란다. 반짝 기억이 되살아난 그 타이밍이었을까.

“넌 어디 사냐?”

“미국에 살아요.”

“좋은 데 산다. 나도 데려가라.”


엄마에게 미국은 여전히 좋은 곳인가 보다.

그날 엄마는 막내와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셨다 한다. 전신마취를 하신 뒤에 엄마의 기억이 손톱만큼이라도 되살아나신 걸까.

날 데려가라는 말은 아마도 엄마 진심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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