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이지 Jul 31. 2023

구름이 예쁠 땐 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곳에선 편안하신가요?

유난히 구름이 예쁜 날이면 하늘을 한참 쳐다본다. 저 푹신한 구름 너머에 아버지가 계실 것만 같다. 조용히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다.

“아버지, 그곳에선 편안하신가요?”

아버지의 웃음 띤 얼굴이 보일 것만 같다.


아버지는 평생 ‘노동’하며 사셨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갑자기 쓰러지실 때까지.

잠깐 의식을 잃으셨다고 했다. 얼굴이 퉁퉁 부을 정도로 찰과상이 심했고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그때가 돌아가시기 1년 전쯤이었고, 식도암 진단받기 4개월 전이었다.

그런 부상에도 아버지는 다시 일하러 나갈 날을 기다렸다. 이제 동생의 사업장이지만, 아버지에겐 평생 당신이 일구어온 일터였다.


난 고물상집 딸이었다. 파지가 수북한 작은 고물상이 아니라고, 엄마가 가르쳐 준 대로 ‘고철상회’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그게 그거였다.

친구들이랑 군것질할 돈이 필요할 때, <어깨동무> 같은 어린이 잡지를 사고 싶을 때, 난 아빠 가게로 달려갔다. 혼자 갈 땐 씩씩하게, 친구가 있을 땐 가게 앞에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사장인데도 아빤 늘 일하고 계셨다. 그저 인부들 일을 돕는 정도아니라 당신이 한 사람분 노동을 했다. 지금도 생각난다. 어마어마하게 큰 트럭 위, 정육면체로 압축한 고철더미에 올라가 있던 아버지 모습이. 친구에게 그런 아빠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심지어 대학생이 되어서도, 아버지 직업이 뭐냐고 묻는 상대에겐 퇴짜를 놨다. 그런 걸 묻는 네가 참 ‘후지다’는 게 핑계였지만, 아버지가 고물상 하신다는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걸 지켜보는 게 더 싫었다.


아버지는 두메산골 6형제 중 장남이었다. 할머니는 몸이 약해 평생 골골하셨고 할아버지는 동네 주막에서 소일했다. 어쩔 수 없이 가장이 된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도맡았고 식량이 될 노동을 했다. 나이가 차 결혼을 했어도 살림은 여전히 궁핍했다. 오빠도 태어났는데 엄마 밥이 없는 날이 많아졌다.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다며 그야말로 ‘무작정 상경’한 엄마를 좇아 아버지도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때 아빠 나이 고작 30대 초반.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아버지가 처음 만난 서울은 얼마나 낯설었을까. 딸린 가족을 생각하면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모르긴 해도 아버진 답답할 만큼 묵묵히 일했을 것이고, 타고난 성실함으로 인맥을 넓혀 갔을 것이다. 몇 해 후 아버지는 당신의 이름으로 된 고물상을 차린다. 시골에 있던 삼촌들도 하나둘 상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물상은 우리 가족뿐 아니라 아버지 형제들의 밥줄이 되었다. 아버지의 땀과 노동으로 일군 회사였지만, 누군가에겐 그저 ‘화수분’이었다. 아버지의 장남 노릇은 삼촌들을 장가보낸 뒤에도 끝없이 이어졌다. 귀가 얇은 아버지는 형제들 말에 이리저리 휘둘렸고 수시로 돈을 떼였다.


결국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거래처 한 곳이 부도를 냈고, 도미노처럼  같이 쓰러졌다. 아버지가 십수 년간 일궈온 사업이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2층 양옥집과  ‘브리샤’ 자가용을 그리워했지만 아버진 당신의 일터를 잃었다는 사실이 괴로운 듯했다. 고물상 일을 하지 않는 아버지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수시로 엄마에게 일을 미루고 딴 길로 새곤 했다. 몇 해 후 오빠가 그 사업을 다시 시작해 보겠다고 할 때, 누구보다 반겼던 건 아버지 아니었을까.


세월이 흘러 고물상은 ‘OO자원’이 되었다. 아버지는 공식적으론 회장님이라 불렸지만 일하는 사람들에겐 그저 ‘잔소리꾼’일 뿐이었다. 당신이 일할 때처럼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고 늘 구시렁거리셨다. 집에선  숟가락 들 힘조차 없어 보였는데 고물상에서  아버지는 세차게 망치질을 하고 계셨다.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당신에게 노동은 곧 ‘살아 있음’의 상징이었다.




엄마가 없는 친정은 언제나 낯설다. 요양원에 계신 엄마도 가끔 아버지 생각이 날까. 만날 혼내던 할아버지로라도 기억에 남았으면 싶다.


친정집 근처 시장길을 지날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식도암으로 투병 중이던 어느 날, 장 보러 간다고 드시고 싶은 것 말씀하시라고 했더니 없으시단다. 동생이랑 시장을 한 바퀴 돌아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전화가 왔다.

“아빠, 왜?”

힘겨운 목소리로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홍어무침….”

“아, 홍어 드시고 싶으? 알았어요.”

날씨는 춥고 시장까지 되돌아가는 길은 멀었지만, 동생이랑 마주보며 미소지었다. 아버지에게 홍어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시장표 홍어무침은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쳤지만 아버지는 그 한 점이 더없이 간절했을 것이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생각해서라도 어떻게 하든 살아야겠다는 그 간절함….

지금도 그때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치매마저 잊게 만드는 막둥이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