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이었다. 엄마는 오른쪽 어깨에 통증이 있어서 치료를 받고 계셨다. 젊었을 적에 과도하게 노동을 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하셨다.
그랬다. 엄마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은 일을 하셨다. 우리집 식구만 해도 여섯인데, 아빠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 식사를 챙겨야 했고, 기름 묻은 작업복까지 빨아 줘야 했다. 냉장고도 없고 세탁기도 없던 시절이었다. 매일 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가야 했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김치를 담가야 했다. 엄마가 왜 시장에 가고 싶어 하는 날 데려가지 않았는지 궁금했는데, 한가롭게 딸 손을 잡고 장볼 여유가 없었던 거였다. 입주해서 집안일 도와주는 사람이 잠시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길지 않았다. 아마도 당신 눈에 차지 않았을 것이고, 젊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모두 당신의 작은 손, 어깨, 다리로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
덕분에 살림살이가 나아졌고, 우리는 드디어 작은 양옥집을 갖게 됐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살림집이 가게와 분리되면서 엄마의 과도한 노동도 줄었다. 우리집엔 냉장고가 생겼고, 엄마도 여유로워졌다. 이제 엄마도 ‘사모님’이 됐고, 온전히 우리에게만 집중했다.
엄마는 조리기구를 팔 양으로 열리곤 했던 동네 요리강습에 가서 빵 만드는 팬을 샀고, 팔이 아프도록달걀을 휘저어 카스텔라를 만들어 줬다. 어느 날엔가 엄마는 백화점에 가자 했고, 쇼핑을 하다맨 꼭대기층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누군가 배고프다고 칭얼거렸는지도 모른다. 뭔지도 모르면서 메뉴판 제일 윗줄에 있는 음식을 엄마가 시킨다. 아마도 ‘함박스테이크’였던 같다. 다른 테이블 사람들이 맛있게 먹던 저걸 시킬 걸(아마도 돈가스였을 것이다), 실망하며 나왔던 기억이 난다. 엄마도 처음 가본 세상이었다.
엄마는 나랑 신문지를 불려 만드는 ‘탈 만들기’ 방학 숙제를 함께 했고, 내가 갖고 놀던 플라스틱 퍼즐 맞추기를 하다 밥을 태웠다. TV로 레슬링을 함께 보며 소리를 질렀고, 엄마는 나쁜 레슬러를 응징하는 김일 선수에 열광했다. 엄마가 행복해 보이던 시절, 마흔 무렵이었다.
하지만 달콤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엄마는 다시 당신 몸으로 하는 노동을 해내야 했고, 그렇게 우리를 키웠다. 당신 어깨의 통증은 그 모든 고됨의 흔적이었다.
엄마는 어깨에 주사를 맞고 몇 번의 물리치료를 하다 결국 인공관절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딸들과도 상의하지 않은 채.
엄마는 그런 분이었다. 당신의 결정은 늘 빨랐고 독단적이었다. 자식들에게 괜한 걱정 시키지 않겠다는 마음도 있으셨을 거다.
그러나 인공관절은 기대만큼 엄마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뭐 하러 이렇게 고생하시느냐 수술하면 깨끗한데,라는 의사 말에 혹했는데 재활의 과정은 힘겨웠다.
예전처럼 어깨에 힘이 붙지 않았다. 무거운 물건을 들기는커녕 단단한 무같은 건 썰지도 못하겠다고 “베려 버렸다”라고 한탄하셨다. 그렇게 당신이 신뢰했던 의사였는데, 인공관절 수명이 15년이라는 말에 다시는 그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 진즉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고 의사를 원망했다.
“아니, 누가 수술하시랬나? 엄마 혼자 결정했잖아. 15년이면 엄마 아흔 살까지 멀쩡하실 거라는데 왜 그러신대.”
난 또 직구를 날려 엄마 속을 긁었다. 그리고 평소 팔십까지만 살고 싶다는 엄마의 거짓말에 안도하며 빙그레 웃었다.
지금 돌아봐도 참 못된 딸이었다. 그렇게 정정하실 때 예쁘게 얘기할걸. 우리 키우느라 아프신 거라고, 고생하셨다고 안아드릴걸.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넬걸. 나는 나이 들어서도 철딱서니가 없었다.
몇주 전, 엄마는 갑작스러운 낙상으로 다시 인공관절 수술을 받게 됐다.
대퇴골 골절은 저절로 나을 수 있는 부위가 아니라고 한다. 담당 의사는 처음엔 몇 개의 핀을 박아 고정하는 수술을 하면 된다고 했는데 치매가 심하시다며 인공관절 수술을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