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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Jul 11. 2021

감정은 글자가 아니다.

영혼의 언어 :

어느 날, 교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써 어떤 것이 가장 구체적일까요?” 


그러고서는 몇 가지의 도구들을 꺼내셨습니다. ‘그림, 조형, 음악, 글’ 이렇게 네 가지였지요. 그리고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하시면서 하나하나 짚어가며 학생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주장을 일일이 들어보셨습니다.


저는 감정표현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단연 음악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음악에다가 한 표를 던졌습니다. 교수님이 왜 음악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셔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음악에는 강약도 있고, 리듬도 있습니다. 현악기도 있고 타악기도 있습니다. 폭발하는 감정은 곡조의 흐름뿐만 아니라 강약의 조절로 표현할 수 있으며, 불안한 감정은 박자 사이사이에 더 많은 리듬을 넣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정도로 얘기했습니다.(말할 당시 저는 베토벤의 '운명'을 떠올리며, 음악의 실제적인 감동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록 두서 없는 말에, 애매한 말을 하게 됐습니다.)


제 주장을 들은 교수님은 ‘이 자리에 심사위원이 앉아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제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음악보다 글이 더 ‘구체적’이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고서는 글이 왜 더 구체적인지 설명을 이어가셨습니다. 저 또한 교수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단어와 문장으로 이루어진 언어는 그 어떤 것보다도 구체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심상을 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해야만 하는 언어는 구체적이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이해해야 하니까요. 그것이 구체성이 지닌 특징 아니겠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길을 걷다가 빵을 들고 전력 질주하는 학생을 보았고, 그 뒤로 제빵모자를 쓴 아저씨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목이 터져라 학생을 부르며 뛰어가는 장면을 보았다고 상상해봅시다. 학생은 그대로 버스를 타고 가버렸고, 아저씨는 허탈한 모습으로 한동안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가 뒤 돌아 구시렁거리며 여러분의 곁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우연찮게 아저씨가 혼잣말을 하는 내용을 듣게 됩니다.

 “아니, 아무리 엄마 병문안 시간이 빠듯해도 그렇지, 구천 원어치 빵을 사고 오만 원을 내고 뛰쳐나가면 어떡하란 말이야. 쟤는 분명 자기가 만원 낸 줄 알았을 거 아니야. 아이고. 어떡하지.”

 이제 모든 상황을 파악한 여러분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학생을 의심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 아저씨의 열심에도 상황이 해결되지 않은 아쉬움, 그리고 나중에 오만 원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학생을 향한 안타까움, 등을 느끼게 되겠지요.
 여러분이 목격한 이 상황과 이때 느낀 감정을 타인에게 전해야 한다면, 글을 써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용이하고 정확할 것입니다. 그림보다, 음악보다, 조형보다, 한 마디의 외침보다 글이 더 ‘구체적’이니까요. (그림과 글을 합쳐서 영화화 한다면 더더욱 구체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참 좋아하지요. 이 이야기는 논점에서 어긋나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서 고구마를 잔뜩 먹은 듯 불편함은 없으셨나요? 혹시 이런 의문이 내면에 스멀스멀 올라오지는 않았나요?


구체성이 왜 그렇게 중요한 건데?


구체적이란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하게 분석되고 펼쳐진 것’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합리성’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구체성과 합리성이 100% 일치하는 말은 아니지만, 이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이 글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타인에게 자신을 증명하거나, 입증하려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왜 화가 났는지, 왜 슬퍼하는지, 왜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평온한 상태로 있는지, 설명해내려고 하지요. 자신이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에게는 그래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왜 꼭 합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그렇다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갈망이 사람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감정을 구체적인 언어로 설명해내는 방법은 감정을 제대로 ‘소화시키는’ 방법이 아닙니다.  

도대체 왜, 우리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타인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내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합리성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 '합리성'이 없다면, 그 집단은 거의 짐승에 가까운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이 이유도 모른 채, 오직 합리적이기 위해 진심을 가리고 억제하고 기만한다면, 그 사람은 순전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 괴리에서 생겨난 염증은 고통과 회의를 낳고, 그것들은 자신뿐만 아닌 타인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너 화났어?”하는 질문에 왜 우리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요? 화가 났지만, 그것을 들춘 상대의 말에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상대와 연관이 있는 화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고 싶지 않아 화나지 않았다고 말하게 되는 그런 복잡한 과정을 왜 거쳐야만 하는 걸까요. (어쩌다 우리는 본래의 모습과 감정이 아닌, 포장을 덮어 씌운 모습과 감정을 보이게 되었을까요?)


감정은 우선적으로 우리의 '내면'에서 발생합니다. 상대에게 ‘설명해내기’ 이전에 말이지요.

그런데 그 감정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내가 ~하게 느끼고 있다.’고 설명해내기 시작한다면, 

그것도 내 감정을 곧이곧대로 설명하는 것도 아닌, 내가 상대에게 보이고자 하는 허위적인 모습으로서의 감정을 설명해낸다면, 우리의 내면은 아주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상대에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벌건 얼굴을 하게 되고, 불편한 감정이 내재된 상태로 잠을 설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이기 이전에 자신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나의 감정이나 행위를 타인에게 ‘잘’ 설명해내야 하는 경우는 면접, 청문회, 법정 같은 곳에서나 필요한 것이지, 사적모임, 가족모임, 친구들과의 만남, 일상생활 가운데서는 오히려 쓸모없을 때가 훨씬 많습니다.(사회생활 가운데서도 여러분이 진정 정직하고 성실한 행실을 취하고 있다면, 굳이 자신을 설명해내려 하지 않더라도 동료들과 상사들이 여러분의 성향과 능력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에게 솔직하여 자신을 잘 아는 사람만이 타인에게 자신을 온전히 설명해낼 수 있습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웃음이 나오네요.


해일과도 같은 슬픔에 잠겨버릴 때는 “나 슬퍼” “나 ~일들 있었어.” “나 ~게 느껴”하고 말하는 것도 좋지만, 그냥 울어버리는 것이, 그냥 소리 질러 버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리고 애매한 조언을 해주며 슬픈 감정은 내면에 묻어둔 채로 여행을 떠나라고, 활기찬 활동을 하라고 조언해주는 사람보다는, 같이 울어주고, 같이 슬퍼해주고, 그저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백배 낫습니다.

 

기쁨이 샘솟을 때는 “신난다!”는 카톡을 보내도 좋고, 좋은 기분에 대해서 글로 써도 좋겠지만, 그것보다는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웃긴 일에 하하하 웃어버리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감정은 구체적인 글로 쓰이면 ‘묘사’이지만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느끼면 ‘삶’ 그자체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사십시오.



메인이미지 - Pixabay로부터 입수된 Dev Ashish님의 이미지 입니다. 

소년이미지 - Pixabay로부터 입수된 mohamed Hassan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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