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면 괜찮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실 그저께 밤에 많이 울었다.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의자에 앉은 채, 침대 맡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얼마나 울었을까.
내 안에 담겨 있던 울분의 총량이 대체 얼마나 됐던 것일까.
내 관념과 다른 실제의 내 모습,
내가 기대하는 상황과 실제 나의 환경 사이의 괴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들.
참 많은 것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온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나는 내 관념대로, 내 기대대로 살 수 없음을.
타인의 삶을 살아줄 수도, 그들의 아픔을 대신 짊어질 수도 없음을.
(아무리 성인'saint'이라도 타인의 삶을 대신 살고, 그들의 아픔을 대신 질 수 없다. 그저 바라보고 같이 기뻐하고 슬퍼해줄 뿐이다.)
내 주변에는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내가 특히 타인의 고통에 관심이 많아서 더 그런 걸 수도 있다.
나는 고통밖에 볼 줄 몰랐고, 대화의 주제는 주로 고통이었고,
삶과 죽음의 주제 외에는 별다른 가치를 두지 못했었다.
그러면서 타인의 고통을 내 심장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내 고통조차도 감내하지 못하면서 왜 그렇게 타인의 고통에 집착했을까.
핑계를 대자면 그게 나의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살아온 환경 가운데서 고통만을 느끼고, 타인과 고통을 나누는 일상만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모습은 늘 극과 극이었다.
겉으로는 착한척 선한척 하면서, 내면에 만성적인 고통을 지고 있으니 일상이 괴롭고, 쉬운 쾌락을 주는 것, 일종의 일상의 탈출구를 충동적으로 찾아 헤매왔던 거다.
그렇게 게임, 운동, 음악, 술, 성(性), 성취, 권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에도 의존적으로 빠져 살았던 거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즐겼던 적은 눈에 꼽을 만큼 적다. 그것들에서 오는 쾌감만, 안정감만 쏙쏙 빼다가 충동적으로, 의존적으로 붙들었던 거다.
게임이나 운동이나 음악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기면서 마주하는 화합, 애정, 우정 따위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내 안에 갇혀 있고, 그 고통의 방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쾌감을, 안정감을 붙들었던 것이니까. 종교도 그렇게 이용했다.
그래서 나의 성(性), 일, 성취, 관계 등등은 다 병들었다. 타인을 이용하고, 해치고, 그들에게 수치심을 줬다. 관계의 끝은 타인이 먼저 나를 떠나거나, 내 뜻대로 이용되지 않는 타인을 내가 떠나거나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고통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문제의 원인을 하나로 딱 집어낼 만큼 단순하지 않다. 나는 심히 꼬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고통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하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고통만 묵상하고, 타인의 고통을 들춰내는 짓을 멈추는 거다.
그리고 그것을 잘 하는 방법은, 고통에 관심을 두지 않는 방법은
지금 내가 마주한 일들을 소중히 여기고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내는 거다.
작은 일들 까지도, 작은 감각 까지도 고통과 비교하여 별것 아니라고 낮게 여기는 게 아니라
소소함은 소소함 자체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나는 대체로 거대한 성취만 즐거워하던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시각으로는 작고 소소한 일들을 무관심하게 보거나 회의적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자주 생겼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괴물이 된다. 성취 말고는 어느 것에서도 기쁨을 찾지 못하는 성취괴물.
매 순간 충실히 살아내며 소소한 것들을 즐거워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는 실제로 마주한 ‘그 고통’만 고통스러워하고, 견디면 된다.
굳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고통을 부풀리고 내가 지금 당장 감당할 수 없는 미래의 고통까지 끌어와 나를 좌절시킬 필요는 없다.
(위의 이야기는 C.S루이스가 주구장창 했던 말이다.)
그리고 아직 며칠 되지 않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는 관심 갖지 않고
내가 지금 마주한 일들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즐거워하려 한다.
그렇게 평소 읽지 않았던 동화도 읽고 그 안의 소소한 내용을 음미하며, 집안에 흘러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흔들리는 나뭇잎사귀를 기분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며,
내 고통과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내가 즐거워하는 것과 타인이 즐거워하는 것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해서 그런지 그것들이 딱 눈꼽만큼만 보인다.
그래도 분자만큼은 아니라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