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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Dec 21. 2021

왜 예전만큼 가까운 사람이 없는 것일까?

고상한 삶을 추구하는 것과, 삶을 사는 도중 고상함을 입게 되는 것

 이것은 연구를 거친 글이 아니기 때문에 내 ‘주관적인 견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감히 생각하는 바,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느낀 사람들이 꽤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왜 내게는 예전만큼 가까운 사람이 없는 것일까?’하는 의문이다.



 최근 아주 혼란스러운 일상을 보냈다.

 

첫째로 내가 이제껏 중요하게 여기던 가치를 배척하기로 했다.

 그 가치는 정말 달콤한 것이었는데,

 ‘네 인생을 살라’는 의미가 중심축이었던 메시지였다.

 나는 위의 메시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왔던가. 이것은 내가 세상을 보는 시선에, 관점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나의 인생을 사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모두 다 ‘나쁜 것’으로 여겼었다.

 나는 무엇이 '내 인생'인지,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도 모른 채, 그냥 내 기분을 잡치는 것이라면, 내가 원하는 길을 막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면 눈앞에서 모조리 치워버리는 인생을 살았던 거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것들을 떼어낸다는 것이, 밀쳐내는 것이 얼마나 우울하고, 때로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는지 모른다.


둘째로, 내가 회피했던 가치들을 붙들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평생 거리를 두고 살고자 했던 나의 가족과 다시 가깝게 지내고(우리 가족은 문제가 많다.), 그들과 함께 하며,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행할 뜻을 품는 것이다. 그 외에도 내가 회피했던 의무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정말 피하고 싶었던, 모른 척 해왔던 일들을 마주하려하자 얼마나 두려웠던지 모른다. 지금도 두렵다. 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내려앉고, 과거를 떠올리면 분노와 염증이 치솟는다.(그래서 생각 안 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할 뿐이다.)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의미들, 가치들, 그것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락내리락하는 나의 감정들, 이것들 때문에 정말 혼란스럽다. 내가 이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해내려 한다면 아마 미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내가 믿는 하나님께(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믿음을 주신 것이지만) 기도하는 것 말고는, 기도하고 나서 내 자리를 정리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가족에게 연락하고, 같이 밥 먹고 하는 것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가운데서 서두에 말한 의문이 들었다.

 ‘왜 내게는 예전만큼 가까운 사람이 없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 의심이 가는 원인이 하나 보인다.



 그것은 내가 ‘고상한 삶’ 혹은 ‘교양 있는 삶’만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고상한 삶과 교양 있는 삶의 의미를 풀어내자면 이렇다.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며, 매너 좋고, 얼굴 붉힐 일을 만들지 않으며, 학술적이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거나, 내가 흥미로워하고 재미있어 하는 주제를 나누는 것. 서로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부담되지 않고, 옷을 지저분하게 입거나 냄새가 나거나 하지 않는, 깔끔하고 명석한 사람들이 서로 하하호호 사이좋게 지내는 삶.


 나는 위에서 말한 고상한 삶을 꿈꿔왔다.

 어쩌다가 그런 삶을 꿈꾸게 되었는지 단 한 가지만을 정해서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영화, 드라마, 뉴스, 블로그, 소설, 만화, 동화, 게임, SNS, 포르노, 주변 사람들, 가정, 학교, 교회, 사회 분위기 등등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나는 위에서 언급한 원인들을 탓하기 보다는 나 자신을 탓하고 싶다. 유럽여행 다큐멘터리를 보고나서 유럽여행을 가보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만사 제쳐놓고 유럽여행을 가야한다고, 그것만이 삶의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고상한 삶을 꿈꾸면서 그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봤던 적이 없었다.


 고상한 삶을 꿈꾸게 되면, 그 삶을 사는 것이 왜 중요한지 따지기 전에 그것을 삶의 가장 최우선순위에 두게 되면, 거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나쁜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고상한 삶을 이룰 수 있는 듯 보이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좋은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제껏 내가 나쁜 것으로 보아왔던 것들이 정말 나쁜 것인지. 좋은 것으로 보아왔던 것이 정말 좋은 것인지 따져 볼 겨를은 생기지 않는다. 다만, ‘이 사람은 고상한가? 이 상황은 고상한가? 나는 고상한 곳으로 가고 있나?’만 따지게 되는 것이다.


 나쁘게 생각했던 것이 내게 인내와 절제를 기르게 하여 더 성숙한 사람으로, 더 어려운 일들과 책임이 따르는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로 이끄는 것임을 알기 위해서는

 좋게 생각했던 것이 나를 스스로를 방임하는 길로 이끌어 나약하고 의존적이고 나태한 존재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알기 위해서는


 ‘고상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최우선 될 일인가?’하는 질문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질문을 던져보지 못했고, 그저 고상한 삶만을 추구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속해 있던 집단들은 참으로 고상한 사람들이었으며, 참으로 고상한 집단이었었다.(그들 가운에 고상함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던 사람들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매너를 지켰고, 고지식하거나 외골수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음악을, 미술을, 스포츠를, 문학을 함께 누렸다.


 아주 좋았다. 그렇게 평생 할 수 있다면 평생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내가 내 가족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내가 책임져야할 상황들이 모두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기만 한다면.


 그리고 바로 얼마 전까지 계속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상정한 이상적인 삶을 계속 살고 싶었다. 비현실의 삶을 실재라고 여기면서, 그것이 평생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살아왔던 거다.


 하지만 그 뒤틀린 가치체계들은 결코 견고하지 못했고, 결국 무너져 내렸으며, 내 정서적 상태도 같이 무너져 내렸고,


 나의 무너진 모습을 고상한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고상한 스탠스를 취하던 사람들, 그 문화를 형성한 사람들에게 내 음울하고 나약한 모습을, 심지어 추하기도 했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던 것이다.)


 아, 내가 고상한 사람들에게 보여줬던 모습은 과연 내 모습 중에서 몇 퍼센트에 해당하는 모습이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사람들에게 자신의 문제만을 드러내는 것은 정말 문제다. 다들 살아가기 바쁜데, 어떻게 남의 문제까지 관심을 갖겠는가.

 나의 의문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고상하지 않은 내 모습들.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비좁은 견해, 때로는 말끔하지 않은 외모, 평소보다 살이 찐 모습, 굽힐 줄 모르는 고집, 짜증,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며

 '관계라는 것은 쉽게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기반이 다져 있기 때문에 불편할지라도 참거나, 다투거나, 화내거나, 돌아서서 시간을 가진 뒤 다시 만나게 되는.

 내가 그런 사람이었나?

 최근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이야기의 방향을 재정비하기 위한 말을 하자면, 고상함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왠지 글에서 그런 분위기가 풍겨나는 것만 같아 덧붙인다. 고상함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자신이 살아내야 하는 삶을 배제한 채 고상함만 붙들려 하는 것은 나쁘다.


 한 예로, 내가 최근 맛이 들린 크로플을 끌어들이면 어떨까.(크로플 너무 맛있다.) 크로플을 먹기 위해서는 카페에 가야하고(*혹은 배달을 시켜야 하고), 돈을 지불하고, 포크와 나이프로 크로플을 썰어서 입 안에 넣어야 한다. 그 다음에 이로 자르고 쪼개며 혀로 맛을 보는 것이다.(물론 그 전에 크로플을 만드는 과정, 크로아상의 생지가 카페에 도달하기까지의 유통과정, 농장에서 밀이 수확되고, 또 그 전에 농부가 씨를 뿌리는 과정은 모두 생략됐다.)


 고상함만 붙드는 것은 위의 모든 과정을 생략해버리고 크로플의 맛만 보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기에 더해 맛만 보고, 또 맛만 보면서 삼키지 않고 살이 찌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그럼 이제 어떡하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사실 나도 완벽한 답은 모른다. 오늘 생겨난 의문인데 어떻게 완벽한 답을 덜컥 내놓는단 말인가. 만에 하나 내가 완벽한 답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그건 100%확률로 사기임에 분명하다.


 지금 드는 생각은

 사람들의 교양 있고 고상한 모습만을, 그런 문화만을 추구하는 자세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과, 내게는 이제껏 내가 고상하다고 생각했던 이미지와 비교했을 때 전혀 고상하지 않는 모습이 훨씬 많다는 것과,

 그것들을 보여줘도 괜찮으며(그것들이 완벽히 선하다는 말은 아니다.), 타인이 고상하지 못한 모습을 지니고 있을 지라도(이 말은 무조건 옳다. 완벽하게 고상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관계의 향방에 영향을 끼칠 만한 것이 아님을 안다면,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간다면,


 충분히 가깝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는 거다.


뭐, 이제 시작인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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