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틀루이스 Jan 11. 2022

불안과 공황에 대한 새로운 시선

진정한 자유란?

어떤 사람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중 천장에 연기가 자욱이 끼고 비상구에서 불길이 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그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난 뒤, 그는 다른 영화관에 갔는데 또 불이 난 상황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는 또 도망쳤다. 그리고 또 다른 날에도 똑같은 일이 발생하여 살기 위해 극장에서 도망쳐 나와야만했다.


그는 이제 극장을 '영화를 보는 곳'으로만 인식하지 못하게 됐다.

극장은 그에게 ‘끔찍한 곳’이 되고야 만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권유 혹은 강요로 극장에 가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영화에 집중할 동안 그는 고개를 쳐들고 두리번거려야 한다.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천장과 비상문을 살피며 문제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그는 그것을 해야만 한다. 그에게 그 행위는 당연한 것이다.


그는 영화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어떻게 집중하겠는가. 오히려 집중하려 할수록, 사방을 둘러보고 싶은데 그러지 않고 시선과 몸을 꽉 붙들고 있으려 할수록, 불안이 들이닥칠 것이다. 심하게는 공포가 엄습하고 공황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존재 목적은 사람들이 극장에 있는 목적과 달리하게 된다.


사람들이 영화에 푹 빠져 다음 내용을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그는 당장 영화가 끝나기를, 영화가 끝나서 빨리 그 건물에서 나가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양 옆으로 꽉 들어찬 사람들 때문에 나갈 수 없다.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스크린 속에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는 동안 그의 내면에서는 토네이도가 일고 있다. 그는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고, 아무런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을 견디지 못해 의식이 끊어져버릴 수도 있다. 어쩌면 온 몸이 마비될 수도 있다.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현재의 삶은 극장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데, 어떡하란 말인가?


그에게 ‘불이 나지 않을 거야’라는 말은 도움이 못 된다. ‘실컷 두리번거려도 괜찮아.’하는 말도 도움이 못 된다. ‘영화에 집중해봐 영화 재미있어.’하는 것은 그나마 좋은 방향의 조언이다.


하지만 그가 영화를 보던 도중 문득 불에 대한 생각이 일기 시작하면 그는 공황에 휩싸이고 말 것이다.



이에 대한 최근의 깨달음을 적어 내려갈 것이다.






살면서 공황을 참 많이 겪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선생님의 질문에 분명한 답을 알고 있음에도 답을 하려 하면 공포가 들이닥쳐서 조용히 앉아 있어야 했으며, 대학시절에는 수업에 참여하는 것 자체만으로(강의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너무 떨려서 청심환을 먹으면서 수업을 들었었다.


늘 만연해있던 잔잔한 불안, 일명 ‘만성불안’

그리고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를 공포와 그로 인한 공황.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담을 받기도 하고, 심리서적을 읽기도 하였으며, 민간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그렇게 불안과 공황을 극복해내는 정보를 경험적이고 객관적으로 쌓아왔고, 공황에 관련한 글을 이곳 브런치에 올리기도 했다. (<내 친구 공황장애를 소개합니다.> https://brunch.co.kr/@littlelewis/72)


하지만 최근 다시금 공황을 경험하고 우울하고 불안한 일상을 지내면서 의문에 휩싸였다. ‘왜 더 나아지지 않는 것일까?’하는 것이 의문과 불만으로 뒤섞여 나왔다.


그러다 정말 감사하게도 한 책을 소개받게 되었다.

책 이름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자는 빅터 프랭클 박사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의 폐혜를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으로,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던 도중 아우슈비츠에 갇혔고,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의 책을 읽으며 내 안에서 불안을 대하는 패러다임이 크게 변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의 대표적인 방법론은 이런 것이다.


떨리나? 더 떨어봐라.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 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p.125 


그의 책을 보면서 깨닫게 된 것은 살면서 불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안을 회피하려는 자세가 더 큰 불안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껏 ‘나는 불안을 잘 느끼니까 최대한 불안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살아야지.’하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그래서 다 집어치우고 바닷가에 살았던 것이었다.), 그 생각은 불안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던 거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런 문제도 마주하지 않으며 홀로 바닷가에 살았다. 하지만 그 상황 가운데서도 불안했다. 그리고 공황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전 공황 글에서 내 삶의 태도를 ‘도망침’에서 ‘마주함’으로 바꾸겠다고 밝힌 바 있다. 빅터 프랭클은 나의 어렴풋한 깨달음이(이 깨달음 또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해석한 석영중교수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타당한 것이라고 과학적 이론으로 설명해낸 것이다.


이제 마주함에서 한 걸음 더 나가보려 한다. ‘걸어감’으로. 그것도 내게 공포를 심겨준 환경 안으로 ‘걸어 들어감’으로.


최근에 메모장에 이런 글을 적었다.

진정한 자유는 제약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불편과 추함을(그것이 진정 추한지 그 안에 가치는 없는지 구분할 줄도 모르는 상태로) 거부하며, 느긋하고 낭만적인 것(현대어로는 감성)만을 이상향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제약을 마주하는 순간 스스로를 진공상태로 밀어 넣게 되는데, 현실에서 그것은 불안으로 시작하여 우울과 공황의 형태로 다가온다.

위의 것이 경험적으로 깨닫고 나름대로 분석한 불안과 우울과 공황의 본질적인 원인이라 보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내게 불안을 일으키는 상황을 ‘회피하거나’ ‘못 본 척 하거나’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분명 덜덜 떨면서, 두려움에 휩싸인 상태로 그 일들을 하게 되겠지만(어쩌면 마주하겠다는 ‘의지’ 그 자체만으로 불안이 물러갈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버텨낸 순간’을 과거에 남기게 되고 (빅터프랭클 인용)

새로이 남겨진 과거는 예전의 불안한 과거를 짓누르고

다음번에 마주하는 어려운 상황들을 더 수월하게 마주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삶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불확실함을 부정할수록 일상은 더 불안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때 불확실한 요소들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하고, 그 인정한 마음을 토대로 행동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에는 현실을 부정하며, 그 가운데 '현실은 이랬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며 막연한 것들만을 바랐었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을 명확히 바라보는 상태로서(현실을 명확히 보기 위해서는 의지와 용기가 필요했다.) ‘이 순간’에 알맞은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다.


혹시, 여기까지의 설명이 서두에 예시로 등장한 인물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할 정도라고, 미비한 수준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는가?


아, 그렇다면 반갑다. 친구여.


서두에 등장한 인물은 필자다. 

필자는 하루하루 생과 사의 끄트머리를 치닫는 감정상태를 오가는 사람이다. 물론 의학의 도움을 받고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필자의 상황은 의학으로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다. 그럼에도 이 와중에 할 수 있는 것을 하려 한다.

 어제도 죽을 것 같이 힘들었고, 지난주도 죽을 것 같이 힘들어서 하루하루 질질 짜면서 일과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필자는 ‘어제’라는 꽤 괜찮은 과거를 남겼고(열심히 살았다.), ‘지난 주’라는 꽤 괜찮은 과거를 남겼다. - 모두 다 하나님의 도움이다. 진실로 그렇다. 이미 한참 전에 무너지고 망가지고 파탄나버린 이 삶의 가치를 도대체 어디서 끌어온단 말인가? 이 순간을 살아내야 할 이유도, 존재의 가치도, 그리고 그것을 살아낼 힘도 모두 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필자 앞에 필자 스스로가 짊어질 수 없는 태산 같은 문제가 산적해있지만, 그것들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우울해지니까. 죽는 것이 답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하지만 죽는 것은 답이 아니다.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 답이다.

내일이 오면, 살아낸 오늘이 

아름다운 열매가 되어

그대에게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니 함께 오늘을 살자. 친구여.

매거진의 이전글 왜 예전만큼 가까운 사람이 없는 것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