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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Nov 07. 2021

도망치고 싶은 사람에게 1.

집으로 정말 가는 길

안녕하세요 동지여.

저는 평생을 도망쳐온 사람입니다.


평생이라 함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지금까지를 뜻합니다.

저는 늘 제가 있는 곳으로부터 도망치기를 원했습니다. 제가 있는 자리를 편하게 여긴 적은 없었습니다. 늘 좌불안석이었고, 늘 우울과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인지하기 시작한 때는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이고, 그보다 훨씬 전부터 학대와 공포 가운데 살았습니다. 학교는 물론이요. 가정도,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그 시간을 온전히 살고 누리고 즐거워했던 적은 없습니다.


저는 늘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는 공상에 빠져 지냈습니다. 집에 있든 학교에 있든 친구들과 지내든, 저는 제 주변사람들과 있는 것이 아니라 제 생각 속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리고 제 주변사람들은 그들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제가 상상으로 그려낸 이미지로서 제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안전을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세상을 안전하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물론 세상은 완벽하게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지옥도 아닙니다.)


세상을 지옥처럼 여긴 저는 세상 사람들 또한 지옥에 등장하는 악마의 이미지로 바라보았고, 그래서 걸핏하면 공포를 느꼈습니다. 부모님의 눈짓에 심장은 내려앉았고, 선생님의 야단은 제 존재를 녹여버렸으며, 친구들의 장난 섞인 조롱은 제가 스스로를 지옥 바닥을 기는 벌레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어디든 좋으니까,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몽상을 하는 기질을 고착되어져만 갔고, 그와 동시에 몽상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인식도 차츰 생겨났습니다. 술과 게임에, 이성을 만나는 일에 중독되기도 했습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는 너무 도망치고 싶어서


자살을 수백 번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살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삶의 의지가 생겨서가 아니라, 지옥을 실제로 믿었고, 지옥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저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저의 고민보다 훨씬, 그 크기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큰 이슈입니다만, 예전에는 자살하면 지옥으로 ‘뚝딱’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살하지 못했고,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며 이때까지 살아왔습니다.


저는 계속 도망쳐 살고 있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공황에 관련한 글을 쓸 때까지만 하더라도 도망치는 삶을 계속 영위하려 했습니다.


나를 학대한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살고, 나를 귀찮게 구는 가족들로부터 떨어져 살려고 했습니다. ‘분리-개별화’가 아니라, ‘분리-단절화’의 인생을 살려 했습니다.(이 구분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리-개별화의 방향이 아니라 분리-단절화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산 속에 있는 집도 알아보고, 인적 드문 시골에다가 집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무너뜨린 공황은 제게

‘너 그렇게 살면 더 쪼그라들 거야’하고 경고를 보내왔습니다.


제가 그 경고를 바로 인식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공포를 느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포를 분석하는 가운데 <<안나 카레리나>>에 등장하는 레빈의 이야기와 석영중 교수가 쓴 <<자유>>라는 책에 등장하는 ‘라스콜리니코프’를 해석하는 내용을 보며, 거기서 저의 모습 또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의 핸들을 돌렸습니다. 크게 유턴했습니다.

‘도망침’에서 ‘마주함’으로 말입니다.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나를 학대한 아버지에게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에는 약간의 수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치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염증과 강박과 편집(偏執)이 있습니다. 공황의 폭발 이후에 아직 여진이 남아 있어 이따금씩 공포가 불식간에 들이닥칩니다. 예전 같았으면 쉽게 편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들 보고 “한 번 와봐”라고 합니다.

“도망가지 않고 마주할 테니까 너의 실체를 한 번 보여 봐. 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라고 합니다.


그러고선 이 순간 제 할 일을 찾아서 합니다. 몽상이나 망상에 빠지지 않도록 말이지요.


어떨까요..


이 마주함이 어떤 결과로 다가올까요.

속편을 언제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내용은 아직 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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