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틀루이스 Jan 27. 2024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이쪽 카테고리 글에서는 늘 그렇듯이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A라는 음식을 입에 집어넣고 맛보며 배를 불릴 때보다, 

그것을 먹기 전에 약속을 잡는 시간, 식당에 가는 길에서 보내는 시간,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시간에 

그 음식이 더 맛있을 거라고 실제로 ‘느껴지는’ 경험을


B라는 장소에 당도하여 이제껏 꿈꿔왔던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을 실제로 마주하는 것보다,

미디어를 통해 그 장소를 처음 접하고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로망을 품으며

언제 그곳에 갈 수 있을지 기대에 차서 기회를 엿보던 시간의

‘그 장소’가 훨씬 더 낭만적이고 가슴벅차게 만들었던 경험을


C라는 사람(특히 연예인이나 유명세가 있는 사람)과 깊은 친분 이상의 관계가 되어

그의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게으른 행동과 배려심 없는 모습에 질려버리고는

예전에 그를 깊게 알기 전에 가졌던 그에 대한 환상이

실제로 만나서 친해지면 정말 행복하겠다는 상상이 현실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험을.


D를 가지고 싶어서 (필자는 요즘 차에 관심이 많다. 차나 집과 같은 물리적인 것이든, 인기나 명성과 같은 비물리적인 것이든) 관심과 노력을 한참 기울여 마침내 그것을 거머쥐게 되었을 때, 그렇게 그것은 더 이상 갈망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 되었을 때,

D에 대한 신비로움은 한 순간 사라지고 마는 경험을.


경험하게 되면, 가지게 되면, 저지르게 되면 왜

신비로움은 사라지게 되는 것인가.


왜냐하면 신비는 ‘소유’라는 이름의 밭에서는 잘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신비는 소유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갈망’이라는 이름의 밭에서 자란다.


그렇게 우리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을 때

그 갈망함에서 흘러나오는 신비로움을(필자는 이것을 ‘무지개’로 표현하길 좋아한다) 느끼게 된다.

무언가를 갈망하고, 그렇게 목적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신비가 사람들의 행위를 일으키는 동력의 원천이 된다.


그렇게 사람의 동력의 원천은 주로 뭔가를 ‘이미 이루거나 가진 것’에 있지 않고 ‘이루지 못하고, 가지지 못하고, 바라는 것’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력의 원천이 앞에서 말한 ‘갈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비로움이나 무지개가 발현되기를 바라지 않는 가운데서도 동력의 원천을 얻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정리하면, 신비로움이나 무지개의 발현을 바라면서 뭔가를 하는 사람(혹은 경우)이 있고, 그것이 없더라도 뭔가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바라면서 뭔가를 하는 경우는 서론에서 다뤘다. 독자들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없더라도 뭔가를 하는 사람(혹은 경우)에 대해서 나누려 한다.


그들의 행위의 동력은 감정도 아니고,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목표물도 아니다. 허기와 갈증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다만 아주 깊은 갈망에서 나온 것인데, 그 갈망에 대해서는 이 글 하단부에서 다루겠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그들은 ‘바라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때로 냉소적으로 보이거나 심할 때는 염세주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본인들이 하는 행위를 ‘뭔가를 얻거나, 어디에 당도하거나, 이룩하기 위해서’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가 이미 옳고 완전하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


집 앞에 낙엽을 치우는 것이 ‘돈을 받거나, 남들로부터 칭찬을 듣거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낙엽을 치워 거리를 깨끗이 하는 것이 이미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이며


일터에서 성실히 일하며 때때로 탁월한 성과를 내기도 하는 이유가 ‘경쟁의식을 가졌기 때문’이거나 '상사에게 칭찬을 받거나' ‘성과급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어진 일에 올바른 기준을 가지고 충실히 행하는 것’과 ‘본인이 충실히 일하므로 기업이 사회에서 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옳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모든 행위에 옳고 그름의 가부(可否)를 논하지는 않는다.


밥을 먹는 행위가 그 음식이 몸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먹는다는 생각을, 식사를 할 때마다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이들도 일상의 대부분의 행위에서 옳고 그름을 떠올리지는 못할 것이다.(옳고 그름의 기준에 반하는 것이 순간 튀어 오르지 않는 한)




하지만 재미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신비로움과 무지개를 추구하지 않는 후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신비로움은 더 가까이, 그리고 더 오랫동안 머문다는 것이다.


위에서 신비로움은 소유할 때보다 갈망할 때 더 발현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후자의 사람들은 소유하는 것을 목적하지도 않고, 행위의 동력이 뭔가를 갈망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알고 그것을 당연히 행하는 것에서 온다고 했는데


왜 그들에게는 신비로움이, 무지개가 더 잘 찾아오게 되는 것일까

 

필자는 이것이 이렇게 밖에 설명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전자의 사람들과 후자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아주 깊은 내면에 그 어느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는 못하나, 그러면서도 갈증이 느껴지기에,
전자의 사람들은 그 갈망을 채우기 위해 각자 나름의 행위를 하며 해갈(解渴)하기 위해 노력하고,
후자의 사람들은 그 갈망이 시간과 삶 너머의 있는 것에서만 충족될 수 있음이 인식되면서도, 또한 그 시간과 삶 너머의 영역이 과거나 미래가 아닌(자기 생각과 느낌의 영역이 아닌) 오직 지금 이 순간하고만(0.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 연결되어 있음을 은연중에 느끼기에,

그래서 지금 주어진 것 외에 다른 것을 바라거나 생각지 않고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시간과 삶 너머의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무엇’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이라는 찰나의 시간에 몰입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아주 잠시나마, 그리고 아주 옅게

  

신비로움은, 더 나아가 갈망의 해갈은 그렇게 은연히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죽음이 있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