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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Jan 16. 2020

행복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행복 블랙홀  

- 엄마 100원만

- 아이스크림 사먹으려 그러지! 그거 먹지 말고 이따 밥 먹어!

- 엄마~ 이번 주 아이스크림 한 번도 못 먹었잖아요. 제발

- 에휴


한숨을 크게 쉰 어머니는 누나와 나를 한 번씩 째려보더니 결국 100원을 주셨다. 누나와 나, 우리 둘을 위한 단돈 백 원.  




가난과 상관없이 행복해

1994년, 내가 여덟 살이었을 당시, 막대가 두 개 달려있는 아이스크림 ‘쌍쌍바’를 100원이면 살 수 있었다. 그땐 군것질거리의 가격이 참 저렴했다. 그렇다고 자주 사먹었던 것도 아니었다. 우리 집은 가난했으니까.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 팽이를 돌리거나, 구슬치기를 하거나, 분식집에서 떡볶이, 떡꼬치, 쥐포를 사먹거나, 문방구 앞 오락기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오락을 하곤 했다. 그렇게 노는 패거리에 나는 끼지 못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위한 팽이도, 구슬도,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일주일에 단 한 번 주어지는 100원은 황금 같은 것이었다. 누나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시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을까. 나는 팽이치기, 구슬치기를 하는 아이들 뒤에서 기웃거렸고, 떡볶이 냄새를 맡기 위해 분식집 앞을 여러 번 서성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락기는, 동전을 옆에 쌓아놓고 시끄럽게 게임을 하던 패거리들이 저 멀리 골목으로 사라져 가면, 나는 냉큼 오락기 앞에 앉아 그들이 놀던 장면을 상상하며 열심히 조이스틱을 돌리고 버튼을 두들겼다. 화면에는 ‘Insert Coin'이 반짝일 뿐이었다.

 


친구들을 부러워하다보면 결국 일주일이란 시간도 지나갔다. 그리고 누나와 나에게도 100원이라는 행복이 주어진다. 그 100원만 있으면 마귀할멈처럼 무서웠던 슈퍼마켓 아주머니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나는 걸핏하면 슈퍼마켓 유리문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군것질거리들을 보며 침을 삼켰고, 훔쳐서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도 참 많이 했었다. 그런 내 맘이 들통 났던 것일까. 평소 아주머니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부드럽지 못해 날카로웠다.) 그 시간은 누나와 내게 자유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곧 우리는 수술실의 의사가 됐다. 쌍쌍바를 정확히 둘로 가르는 대 수술!


우리 집은 낡고 허름한 집이었다. 집 밖에 있던 재래식 화장실에는 곱등이가 득실거렸고, 집안 장롱 밑은 바퀴벌레의 아지트였다. 엄마, 아빠, 누나 그리고 나는 그 허름한 집안 벽지가 뜯겨나간 방에 나란히 누워 잠을 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것이, 그 청결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잠을 잘 잤다는 거다. 엄마 아빠의 요란한 코골이에도, 바퀴벌레가 내 배를 물고 도망쳐도, 집 밖에서 밤새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도 잘 잤다. 지금은 벌레 하나 없이 깨끗한 오피스텔에 살지만, 옆방 TV소리가 조금만 커도 신경 쓰여 잠을 잘 못 이루는데 말이다. 그때의 나는 대체 어떤 이유에선지 온 가족이 한데 누워 잠들 준비를 마치면 낄낄 거리며 누나에게 장난질을 쳤다. 뭐가 그렇게 웃겼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잠에 골아 떨어졌을까.




난 행복했다.

내가 만약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대답할까? 답은 뻔하다. 행복해요라고 하겠지. 먹고 싶은 거 못 먹어도, 가지고 싶은 장난감 못 가져도, 엄마 아빠는 서로 밀치고 싸우고, 아빠는 엄마를 때리고 우리들도 때리고, 엄마는 우리에게 윽박지르고 아무것도 못하게 해도, 그래도 행복하다고 대답하겠지.  어린 나는 세상의 전부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엄마와 아빠와 누나, 이들만 있다면 슬픔도, 두려움도, 고통도, 즐거움도, 기쁨도 전부다 행복으로 여겨졌을 테니까.


How about now?

지금은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행복하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내가 행복한가?’하는 질문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깔끔한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대충 그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거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왜 행복한지 각종 정보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답변하지 못하는 거다. 어떤 이는 가족이 있기에 행복하다 말하고, 자신이 꿈꾸던 일을 하기에 행복하다 말하여, 누구는 마음껏 여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취미여가를 누릴 수 있기에, 배곯지 않을 수 있기에, 아픈 곳이 없기에, 아파도 살아있기 때문에 등,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행복의 답변들이 존재한다. 



그럼 나는?

다른 글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기준이 없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의견이나 감정상태에 좌지우지되는 의존적인 사람이 나다. 그런 내게 마치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주는 듯 하는 광고카피 문구들은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행복의 답으로 여겼다. 여행을 실컷 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멋진 몸을 만들면, 완벽한 이성을 사귀면 행복할 줄로 착각했던 거다. 실제로 앞선 행위들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지만, 오히려 그것들에 의존적이게   행복하다고 고백할  없었다.


그럼 여기서 스스로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한 거냐고. 나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불행하지 않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니니까.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사람은 불행과 행복 사이 언저리에 걸쳐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 씁쓸함을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행복하지 못하다고 불행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내 안에 뭔가 자꾸만 불편하다. 그리고 그 불편감은 내가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라 일부로 더 착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이 느낌은 뭘까? 


행복 강박

대중매체에서 들려오는 메세지를 들어보면, 어떻게 하면 잘 살지, 어떻게 살면 즐겁고 행복한지에 대한 내용이 수두룩하다. 그것들을 보며 내가 꼭 행복해야 할 것만 같다는, 잘 살아야 할 것만 같다는, 전에는 하지 않았던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마치 별로 크지 않은 얼굴의 점을 흉하다고, 그걸 지워야지 예뻐지고 자신감이 생긴다고 하는 말처럼.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는  살아야 하고, 남들에게  보이도록 성공해야만 하는, 지금 모습의 내가 이뤄내기엔 어려운 일들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어오고 있었던 거다.


그 마음이 내게 불편감을 줬다. 과장되게 말해, 불행하지 않아도 되는 내게 불행을 안겨다 줬다고 나는 생각한다.  것을 기대하는  마음,  일상의 몸부림을 거대한 업적으로 보상 받으려는  마음이  맘속 괴물이 되어 그것이 도래하면 행복도 함께  거라고,  시간이 오기  까지는 행복하기 어렵다고 속삭이고 있었던 거다. 


그러나 그 말은 거짓임을 조금만 살펴봐도 깨달을 수 있다. 내가 바라고 꿈꾸던 것을 성취한 사람, 결혼하고, 돈 많고, 유명하고, 권위 있고, 명망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행복한 것은 아니니까. 그것들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만약 절대가치가 되어 삶의 모든 행복의 기준으로 삼아버리면 순간 그것은 주위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행복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첫째, 행복하지 않기로 했다.

행복은 사랑하는 연인간의 애정과도 같아서 붙잡으려 할수록 더 멀리 도망가 버린다. 또 붙잡을 의향을 숨기고 붙잡지 않고 있더라도 잘 다가오지 않는다. 행복은 눈치가 빠르니까. 그것이 오는지 오지 않는지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 열심히 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행복은 발견하는 것이고, 발견이라 함은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찾아내게 되는, 의도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쁨이다.



둘째, 그래서 나는 위대한 작가가 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 붙잡지도 못하고, 도달할 것이라 확신할 수도 없는 모습을 꿈꾸며, 그것으로 단번에 삶의 모든 것을 뒤바꾸는 행복을 얻으리란 동화 같은 바람을 하지 않기로 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에 얼마나 자주, 그리고 큰 부담을 느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상관 안하기로 했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한 내 모습에서 오는 괴리감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물론 '위대한 작가가 되면 행복할 수 있는 기회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은 맞다. 허나, 이 글을 정독한 독자라면 벌써 인지했겠지만 위의 말은 이 글의 논점과 다르다. 건물주와 일반인을 놓고 비교하면 건물주가 행복할 수 있는 ‘가시화 된 기회’야 훨씬 많겠지. 하지만 아직 건물주가 될지 안 될지 가능성도 아주 희박한 일반인에게 ‘건물주만 되면 모든 삶이 바뀔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현재의 누릴 수 있는 모든 가치를 평가절하 하도록 만드는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거다. 우리는 위대한 누군가가 됨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위대한 누군가가 되려고 하는 욕심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다. 




며칠 전, 노량진역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100원을 떨어뜨렸고, 100원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길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흘린 사람은 그 돈을 줍지 않고 그냥 갔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 또한 그 동전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신호는 바뀌었고, 사람들은 분주히 제 갈 길을 갔다. 100원은 철저히 무시됐다. 나에게도.


그런데 만약 땅에 떨어진 것이 동전이 아니라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램프였다는 것이 밝혀졌다면, 내 반응은 어땠을까. 주변에 달려드는 사람들을 밀치고 제치지 않았을 거라 확신할 수 있을까. 나 혼자만 램프를 붙들어버리고, 허탕해하는 군중을 뒤로한 채 “지금 당장 나를 세상에 둘 도 없는 위대한 작가로 만들어줘”라고 소리치지 않았을 거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당신의 행복 블랙홀은 무엇인가?      






메인이미지 - Pixabay로부터 입수된 Ralf Kunze님의 이미지 입니다. 

사진1 - Pixabay로부터 입수된 Mabel Amber, still incognito...님의 이미지 입니다. 

사진2 - Pixabay로부터 입수된 Ryan McGuire님의 이미지 입니다. 

사진3 - Pixabay로부터 입수된 StockSnap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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