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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Feb 04. 2020

자기 의견 있습니다만, 고집이라니요.

쉽게 단정 짓지 않도록

아직도 우리의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 곳곳에는 개인의 의사표현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가 남아있는 것 같다. 기존부터 이어왔던 암묵적인(또는 명시된) 질서나 분위기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껄끄러워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질서를 흔들게 하는 낯선 변화를 반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불편해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이때 변화를 일으키거나 질서에 융화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의견만이 아닌, 의사를 표현한 사람들 또한 부정적으로 보기십상이다. 사실 그 사람의 ‘의견’이 좀 남다른 것인데, 의견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그 사람 자체’를, 또는 ‘그 사람의 인격’을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의사를 묵살시키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 사람을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면 된다. 집단 내에서, 모임 가운데서, 아니면 단 둘의 관계일지라도 누군가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면, 그 사람이 아무리 합리적인 주장을 펼치더라도 별로 효과가 없게 된다. - 예로 수영을 좋아하는 A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사람 수영장 가는 거 이성 몸매 보러 가는 거 아니야?’ 하며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그 이야기를 들은 주변사람들은 A의 수영 취미를 아니꼽게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의사표현은 정말 고집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자기의지, 자신의 의사표현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좋지 못한 것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인간만의 특질이다. 그것은 충동적인 선에서 그칠 수도 있고,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의지적인 선까지 올라설 수도 있다. 우리는 20분만 더 자기를, 치킨을 한 조각 더 먹기를, 수업시간에 웹툰을 보다 걸린 친구가 나 또한 물고 늘어지지 않기를, 부모님의 간섭이 그치기를,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다리 좀 그만 벌리기를, 내 세금이 엉뚱한데 쓰이지 않기를 바라고 또 표현할 수 있지 않는가? 


자기의사표현이 고집이라면, 세상은 온통 고집쟁이들로 가득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너, 나, 우리 모두가 고집쟁이가 되는 거다. 이 논리대로라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을 고집쟁이라 비난하는 사람 또한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는 거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것이 고집이다. 

자신의 주관이 있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은 고집이 아니다. 자신의 욕구나 생각이 있지만 그것이 나 자신만의 이슈가 아닌 타인과 결부된 이슈가 되어 그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거나 그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며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는 것을 고집이라 하는 거다. 이것은 단지 의사표현을 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 않는가. 그런데 어쩌다 ‘자기표현은 고집’이라는 편견이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있는 것일까? 


(아래 내용부터는 논점이 확대된다.) 

   


솔직히 말해, 우리 사회는 아직 다름에 익숙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는 질서와 조화를 중시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었고 아직도 그것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질서는 지위와 성별과 나이로 유지되었으며, 개인보다는 가정 또는 집단이 우선순위였다. 가정 내에서 한 개인이 ‘나만의 인생을 살겠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시대 또한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가정 내의 규칙, 사회 속의 통상적인 예의범절 가운데 과거의 문화가 남아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은 세대마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삶의 가치관과 문화가 다르다. 물론 과거에도 세대마다 생각이 다르기는 했다. 고대시대에도 어른들이 막나가는 젊은 세대를 비난하는 일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가정, 학교, 사회문화를 통해 그리고 기술의 발달로 인해 온 세계에서 밀려들어오는 컨텐츠과 또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각기 다른 문화를 통해 새로운 가치관과 이념을 접한다. 그렇게 개인, 집단, 세대마다 생각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활용하는 매체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지기도 하는 거다.  



나 또한 ‘그들’이 될 수 있다. 


가치관의 차이는 소통형식의 차이를 일으킨다. 전통방식의 화목과 질서가 최대 가치인 사람과 현대의 개인의 안녕과 자기실현이 절대가치인 사람은 대화가 통하기 어렵다. 전통방식의 집단은 유기체처럼 연결 되어 있고, 개인의 합리적인 주장보다는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권위가 더 중요시 된다. 자기실현이 중요한 사람들은 개개인의 생각과 의견, 합리성이 상호 소통에 있어 주요한 요소가 되는 거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어떻게 아무런 문제없이 평화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누군가 양보하고 희생하지 않으면 말이다. 


주요한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상대의 주장이 전혀 공감되지 않는 어불성설로 들릴 수도 있는 이런 상황은 때로 상대를 고집쟁이로 부르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게 하기도 한다. 스파크가 튀는 거다. 자신 또한 고집쟁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현대인이라 할지라도 토론장에 나와서 토론이 아닌 인신공격을 일삼으며 싸우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하지 않는가. 


이제껏 마주해 본적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며, 상대의 의견을 듣기 보다는 윽박지름, 무력, 동정을 가장한 협박, 때론 방임이나 절연(絶緣)으로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켜버리는, 집단을 위해서라면 또는 개인을 위해서라면 폭력 아닌 폭력을 행사해도 괜찮다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나아질 수 있을까? 

앞서 말한 상황은 분명 딜레마다. 현재 우리는 가족 내에서, 사회적 집단 내에서 큰 모순과 혼란과 괴리를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나아질 수 있다. 그것은 상대의 의견을 ‘고집’으로 여기는 내 생각습관을 내려놓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앞서 말했듯이 상대를 고집쟁이로 치부해버리면 내 논리를 펼치고 주장을 관철하기가 훨씬 간단해진다. 그 순간만큼은 말이다. 하지만 말만 오갔을 뿐이지 변하는 것은 없다. 양 측 그 누구도 변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버리니 말이다. 


나 자신의 목소리가 타인에게 고집으로 여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타인의 생각을 고집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신에 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타인이 그 말과 행동을 보인 것은 어떤 취지에서 한 것인지, 서로 들으려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시간도 많이 걸릴 뿐더러 피곤하고 힘들기도 하다. 허나 분명한 것은, 아래 방법보다야 훨씬 낫다는 거다. 


함께하는 집단 내에서 타인 또는 타인의 행위를 내 관점대로 부정적인 것이라 단정 짓고 내 의견만을 관철 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외곬수다. 이런 사람은 어느 날, 자신이 보고 그냥 지나쳤던 문제들이 큰 폭탄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목격하게 되거나, 결국 홀로 남겨지게 될 거다. 



메인이미지 - Pixabay로부터 입수된 Free-Photos님의 이미지 입니다. 

사진1 - Pixabay로부터 입수된 Maike und Björn Bröskamp님의 이미지 입니다. 

사진2 - Pixabay로부터 입수된 Free-Photos님의 이미지 입니다. 

사진3 - Pixabay로부터 입수된 Ralf Kunze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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