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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Feb 19. 2020

이 또한 지나갈까?

가기는 간다.

이 글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내 일상에 맞춘 지엽적인 개념이다. 세계의 위대한 석학들이 말한 것과는 다른 개념이며, 어려운 일을 습관적으로 회피코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글이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마주했었던가.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제목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는 했다.      


“이 또한 지나갈까?”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너무 힘드니까. 고통은 그 순간 실재하는 거였으니까.

당시 나는 지금 내게 닿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가 없었던 거다.


현재 버티기 어려울 정도의 힘듦과 어려움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 말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고통의 미로를 헤매고 있노라면, 출구가 아무리 가까워도 실제로 나가기 전까지는 자신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는 거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려움의 시기는 우리를 주눅 들게 한다. 그럴 때는 동화 같은 꿈을 꾸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 현실의 문제를 돋보기로 씌워 보여주는 듯 하는 느낌을 계속 받게 된다. 고통 외의 다른 어려움들 까지도 심장에 닿는 듯 확대되어 다가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시험에 떨어지면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내 나이가 많아 보이고, 몸 어딘가 크게 다치면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없을 것 같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면 삶의 의미가 없어진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길에 있다면, 내 의지가 아니더라도 어디선가는 분명 이 말을 주워듣게 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그런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지금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지금 이 순간도 지나가겠지. 지나가는 것은 알겠는데,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또한 지나간다. 절대로 지나간다. 공포였던 치과 치료도, 히스테리에 걸린 담임과의 학교생활도, 불합격의 쓴 잔을 배 터지게 마셨던 때도, 공황장애 때문에 밖을 나가지 못했던 시기도 다, 전부 다 지나갔다.


그런데, 그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이 또한 지나갈 거라는 생각이 도움이 됐던가? 아니었다. 


나는 당시 왜 그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 마지않았던가? 버거워서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당나귀에게 “이 또한 지나갈 거야”하고 말해봐라. 아마 엄청 큰 소리로 웃어 젖히고 제 갈길 갈 거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것을.


우연히 당나귀가 지던 짐을 내가 지게 됐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끙끙 거리며 길을 가고 있다. 그때 누군가 와서 “이 또한 지나갈 거야”라며 오지랖 부린다면, 나는 그 말을 한 사람에게 내가 지던 짐을 지우며 “이건 현실이야”라고 속삭여 주겠다.



우리는 뭔가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는 이 또한 지나갈 거란 말을 되뇌지 않는다. 남한테도 잘 안 한다. 예로 지금 대박을 터뜨린 영화 <<기생충>>의 배우와 제작진들이 한바탕 파티를 벌인 곳에 가서 “이 또한 지나갈 겁니다.”라고 말해봐라. 아마 봉준호 감독의 그 순박한 얼굴에서 얼음장 같이 차가운 갈굼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우리는 좋은 시간에는 ‘그 말’을 하지 않는다. 인생을 깨우친 성인(saint)들이나 할 뿐이다.


‘그 말’은 힘든 시간이든, 좋은 시간이든 찬물 끼얹는 역할을 한다는 게 첫 번째 결론이다.  




두 번째 결론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그 말’을 할 때는 분명 그 순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는 그 순간을 회피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회피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순서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다.


현재 위험한 순간에 있다고 간주해보자. 예를 들어 절벽 위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는 중이다. 이 때 ‘그 말’을 되뇔 겨를 따윈 없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은 균형을 잡고 발을 정확하게 내딛는 거다. 그런데 그 순간 몸에 집중하지 못하고, 감정이 요동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어떻게 될까? 패닉이 오는 거다. 몸이 굳어버려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현재 적당히 긴장되는 순간에 있다고 간주해보자. 예를 들어 면접을 보러 간 거다. 면접 대기실에서부터 면접관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까지,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준비한 내용을 머릿속에 되뇌고 해야 할 말을 생각해내어 조리 있게 하는 거다. 그렇다면 그 순간 ‘그 말’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괜히 다른 데에 마음이 쏠리면 어떻게 되는가?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거다. 


현재 잔잔한 불편함 가운데 있다고 간주해보자. 예로 취업 준비 중에 있거나 시험을 앞두고 있다. 이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나보다 당사자들이 더 잘 알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때 이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어떻게 되는가? 이 순간은 힘들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따라서 내 손에 닿지 않는 미래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지금 당장 만족을 주거나 빠른 미래(내일 또는 다음 주)에 즐거움을 보장하는 것들을 붙들게 된다. 그렇게 게임, SNS, 유튜브, 연락, 술자리 등을 생각하고 기대하며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날려먹게 되는 거다. 


‘그 말’(정확히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다.  



마주하면 오히려 편해진다.

시간은 간다. 하지만 해결하지 않은 문제와 그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쥐구멍에 숨어 100년이란 시간을 흘려보낸 후 밖으로 나와도, 당신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을 거다. 또한 처음에는 작은 문제였더라도 100년이란 시간동안 그 문제는 당신의 마음속 괴물이 되어 있을 공산이 크다. 덮어뒀다가 커져버린 문제는 해결하기 더욱 복잡하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더라도, 불편해도 마주해보자. 그렇게 하면 문제는 줄어들고 용기는 커지는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문제가 더 커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이미 경험이라는 결과물이 있다. 더 치밀하고 철저하게 그 일을 마주해보자. 또 다른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쌓이면 당신은 전문가가 된다.


내일의 약속이나 다음 주의 술자리는, 그때 가서 즐기기로 하자. 그것들을 생각하며 지금 이 순간을 흘려보내지 말자.  


지금  순간 책을 읽으면 당신은 책을 읽는 사람이란 과거를 남기게 되며, 책을 읽는 사람으로 미래를 마주할  있다.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방치하지는 않는다. 의료마취로, 상담으로, 사회적 제도로. 그러니 그런 어려움이 올까봐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자. 일단 해보자.


이 또한 지나간다.
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그것이 크든 작든
당신이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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