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관계의 방향키
저는 사회복무요원으로 2년간 시청의 한 부서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지금과는 다르게 늘 시끄럽고 활기차고 말이 많았던 저는, 40~50대의 아주머니 공무원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몇 년 전부터 그 부서에 존재해왔던 내부자들의 그룹, 일명 ‘점심그룹’에 낄 수 있게 됐습니다.
점심그룹의 본래 멤버는 제가 근무하던 부서에 3명, 다른 과에서 근무하시는 한 분까지 더하여 총 네 명이었습니다. 제가 들어가면서 다섯 명이 된 것이지요. 이 그룹의 멤버들은 일과를 보는 중 여유시간이 나면 다음날 또는 다다음날의 점심메뉴를 고민했습니다. 근무지가 시청이었던 만큼 주변에는 맛집이 많이 있었고, 공무를 보는 사람들에게 맛집을 검색하는 일만큼이나 개인적이면서 즐거운 일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 점심그룹은 집요하게 주변 맛집을 검색하고 카페도 찾았습니다. 어쩌다 새로운 식당이 들어서게 되면 5인석을 예약하고 가기 전부터 기대에 부풀어 어쩔줄 몰라 했던 우리들의 모습이 생각나네요.
점심시간이 되어 밥을 먹으러 가면 하게 되는 행동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먹는 것과 대화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서 음식에 대한 평가를 하고, 다른 식당과 맛과 가격을 비교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나누는 일상의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점심그룹에서 저(20대 중반의 남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모든 아주머니들이 결혼을 했고, 자녀가 있었으며, 다 같은 7급 공무원이었고, 비슷한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딱 봐도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대화의 주제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그룹이었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분들의 대화 주제에 끼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자녀양육, 결혼생활, 업무와 가사 일을 병행하는 것 등의 주제에는 제가 끼어들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늘상 그 이야기들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외에도 슬슬 저도 공감하고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주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운동, 다이어트, 건강, 주식, 부동산, 예술, 여행, 뉴스에 관한 토픽이 그것이지요.
앞서 말한 토픽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저는 일순간 점심그룹의 대화주제를 이끌어가는 사람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의 ‘아~ 그렇군요.’를 연발하며 공감하는 척 리액션을 담당하던 처지에서 환골탈퇴 한 것이지요.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잡상식’에 능했기 때문입니다. 공익요원이 되기 이전부터 저는 여러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해지는 방법을 늘 물색하던 사람으로, 그 방법들 중 ‘대화’라는 것이 엄청난 파급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는, 특히 잘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상식을 섭렵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이런 경위로 저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관심 있어 할 만 하는 주제들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기 위해 공부를 했던 것이지요.
저는 건강, 오락, 연예, 스포츠, 주식, 경제, 부동산에 대한 정보에 추가로 저의 개똥철학까지 더하여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갔고, 점심그룹의 아주머니들은 저와 이야기하는 것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됐습니다. 저는 그 그룹의 ‘인싸’가 된 것이지요. 그렇게 저는 얇고 넓게 알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기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던 타인들과 교류하는 것을 이어나갔습니다. 대학에서도, 직장에서도, 각종 모임에서도 말이지요. 불과 얼마 전까지 그랬습니다.
하지만 누가 만약 지금의 저에게 '그때 그 상황으로 간다면 그때와 같이 인싸가 되겠는가?' 하고 물어본다면, 저는 아주 당연하게 ‘아니오’라고 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일은 제 성향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하다 자연스레 인싸가 되어있는 것과, 인싸가 되기 위해 자신의 성향을 포기하고 지속적으로 타인들의 이목과 관심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으며, 후자에 속하는 사람은 일상에서 엄청난 피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피로가 지속되게 되면 가족이나 친한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무뚝뚝하게 대하거나 심지어는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수도 있습니다.(이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많이 다룬 것 같네요.)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저는 굳이 여러 사람들과 공통의 주제를 나누며 어울리려 하는 피곤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디서 받은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려서부터 저는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을 나의 필요와 상관 없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집단 내의 메인 그룹(내부자)에 끼지 못하면 내가 잘못된 것만 같고 그곳에서의 생활을 건강하게 하지 못하는 것만 같은 자격지심에 매몰되어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자신의 행동양식을 계속해서 바꾸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진심 보다는 주류를 따르고, 마음의 소리 보다는 타인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하지’하며 그 안에서 생겨나는 불안의 목소리를 따랐던 것이지요.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자신의 진심을 억누르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류가 되기 위해, 제가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잡다한 상식들을 익혀나갔습니다. 그 시간들은 제가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노래'와 '작곡'의 심오한 세계를 더 깊이 알아가는 기회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야 맛을 들인 '독서로부터 누리는 향기'를 10년 전부터 맡았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주류가 되는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주류가 되어야 할까요? 아니, 굳이 주류까지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생각을 공유해야 할까요? 아주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 할 수 있고(그렇게 외골수가 되지 않을 수 있지요), 타인의 정서적인 지지를 받는 동시에 안정감을 받을 수 있으며, 혼자 있는 것과는 다른 류의 다양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여러 면에서 장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장점은 하나도 얻지 못한 채 자신이 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모르면서, 내면에 불편한 감정의 작은 생채기 하나 생기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타인과 교류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이유가 정말 타인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고 유익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마치 술에 중독된 사람이 진탕 술을 마시고 나면 머리가 아프고 몸이 말을 안 듣게 될 것을 알면서도 술을 찾는 것처럼 사람을 만나고 다닌다면 어떡해야 할까요?
그런 경우에는 사람을 고파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모습과 행동, 그리고 내면을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 만남들이 내가 얻을 것이 있는 생산적인 것인지 아닌지'만을 따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유익이 있으면 누군가에게는 희생이 생겨나게 됩니다. 서로가 관심 있어 하는 주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눌 때도 의견의 불일치는 분명 발생하며, 그 가운데 감정의 소모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유익만 추구하는 식의 교제를 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가끔은 상처가 발생할 수 있을 지라도 서로 자신의 진심어린 이야기와 감정을 나눌 줄 아는 교제를 하는 것', '함께 그런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사실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 가운데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개인적이고 심도 있는 주제 보다는 모두가 나눌 수 있는 공통적이고 가볍고 이슈화 되어 있는 주제를 나눌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그런 이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한다면 그때 발생하는 괴리로 인해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누구나 좋아하고 관심을 가지는 대중드라마, 시사, 교양 등의 이야기를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친구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관심이 없고 곤충채집이나 LP판을 모으는 것과 같이 대중적이지 않은 취미만을 가진 사람이 여러 사람을 두루두루 사귀고 싶어 한다면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위와 같이 대중적인 이슈에 관심이 없을 때는
1. 평소 관심 없는 분야에 발을 들이며 관심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과 친해지거나,
2. 그리고 친해진 상태에서 또 관심 없는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거나,
3. 아니면 그냥 자신과 죽이 잘 맞는 소수의 친구들과 여러분이 원하는 교제를 나누시면 될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두 가지 방법(원하지도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 원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섞어서 살아가고 있긴 하지만 말이지요.
오늘 글을 여기까지입니다. 결론이 석연찮지요. 사실 애초에 딱 떨어지는 답이랄 것이 없는 의문이었습니다. 인간관계는 특정한 행위를 하면 기분 좋고, 특정한 행위를 하면 기분 나쁘고, 특정한 행위를 하면 기분이 좋은 듯 나쁜 듯 모르기도 한 것이니까요. 섣불리 특정한 것을 절대화 했다가는 그 물건을 잘 못 휘둘러 누군가가(혹은 자신이) 상처 입는 불상사가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내면에 분노가 끓는 사람에게 알려줘야 할 방법은 건강하게 화를 내는 방법이지, 웃는 것을 강요했다가는 감당치도 못할 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목격할 수도 있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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