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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Jun 30. 2020

잘못된 강요 : 용서

얼마나 제대로 하고 계신가요

선배니까 참아
동생이니까 참아


저는 개인적으로 위와 같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참아야 하는 이유를 전혀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위의 말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어떤 말을 다 가져다 붙여도 되는, 논리의 구조가 거의 없는 말입니다. 어떻게든 말이 되지요.

 

가끔은 저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뺨을 한 대 때린 후 이렇게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한 대 맞았으니까 참아”  




오늘은 용서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용서란 미덕에 대해 ‘좋은’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흔히들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남을 도와주는 자선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처럼, 규모나 횟수와는 상관없이 ‘용서하는 행위’는 다 좋은 것으로 보이고는 합니다.      


하지만 용서를 무조건적으로 옳게 여기는 것은 때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특성상, 용서는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행한 사람, 용서를 받고자 하는 사람, 문제가 있는 어색한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대다수 ‘빠른 용서’를 바랍니다. 그래서 손해를 보거나 상처를 입어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있는 사람에게 어서 빨리 용서를 베풀라고, 또는 부디 용서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하지요. 그게 과연 용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이전보다 더 낫게 변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취해야할 바람직한 자세일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용서란, 내면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염증과의 싸움입니다. 상대를 생각할 때 끓어오르는 분노와 공포를 밀어내며, 그 자리를 대신하여 이전보다는 더 나은 마음을 취하려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잘못을 한 상대방의 환경과 내면이 이전보다 발전하기를 바라게 되는 자세를 취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과연 이게 “용서할게” 이 한마디로 뚝딱 이뤄질까요?      


물론 용서는 의지를 필요로 합니다. 마음의 변화를 꾀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상대의 잘못한 모습만 떠오르기 때문에 내면에서는 상대를 미워하거나 무서워하는 마음이 쉬지 않고 끓어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의지와 뜻의 어마어마한 전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의지에 ‘자율성’이 결여된다면 어떨까요? 그 행위가 온전한 의미에서의 용서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의지와 뜻의 전향은 오직 그 당사자만이 이뤄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부탁할 수는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용서는 절대 강요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타의로 인해 “용서한다.”고 말한 사람이 얼마나 그 진실함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아직 내면은 증오, 두려움, 불편한 상처로 어려워하고 있는 사람이 단지 ‘용서했다’는 말을 했다는 것 때문에 진심을 억누른 채 타인에게 웃어주며 그 관계를 이어간다면, 그 관계는 도대체 어떤 관계입니까? 누구 좋을 관계일까요..  




메인이미지 - Pixabay로부터 입수된 Cheryl Holt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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