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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Aug 11. 2020

자유의 두 방향

소극적인 자유와 적극적인 자유

일반적으로 ‘자유’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교도소 탈출 장면은 자유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지요. 주인공인 앤디가 좁고 냄새나는 하수구를 460m 씩이나 기어 나왔을 때, 폭우와 천둥에도 아랑곳 않고 두 팔 벌려 하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그것이야말로 ‘자유’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언제 우리는 자유를 떠올릴까요. 수년간 일했던 직장(좋은 곳이든 그렇지 않은 곳이든)을 그만두고 단톡방에 마지막 인사를 올리며 팀톡방, 부서톡방, 친하지도 않았던 친목 톡방을 삭제할 때, 그러면서 더 이상은 주말에도 톡방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며, 이제는 한동안 주말이든 평일이든 상관 않고 퍼지게 자던가, 아니면 평일 한적한 시간에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든 넷플릭스를 보는 상상을 할 때, 자유를 느끼지 않을 현대인이 있을 까요?


추가적으로 하나를 더 떠올려보면 여행이 있을 것입니다. 폰 화면으로만 보던 푸른 바다와 산과 계곡, 예술적인 건물들을 직접 마주하며, 상상으로만 했던 모든 일들을 실제로 하게 될 때, 우리는 자유롭다고 느낄 것입니다.


앞선 예시들은 웬만해서는 반대하는 사람이 없는 자유의 개념이자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이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부터 벗어나는 것’,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즉 ‘일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의 자유의 의미를 ‘일탈’의 개념으로만 간주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자유의 뜻을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임, 또는 방종입니다. 세계 어디를 보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사람을 자유로운 사람이라 말하는 곳을 없을 것입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이성을 만나고 싶은 대로 만나고, 자고 싶으면 자고, 싸고 싶으면 싸고, 취하고 싶으면 취하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자유롭다’고 말했던 적이 있던가요?

 (만약 바라는 바가 오직 좋고 선하고 자신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들로만 가득한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절제하고 인내함으로서 행실의 열매를 거두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자유를 일탈로 간주하는 개념이 나쁘다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유의 또 다른 의미를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바라는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행복’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의 집합에 포함되어 있는 자유를 이해를 돕기 위해 행복과 등치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자유 = 행복” 이라고 말이지요.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자유는 곧 행복이다’라고 했을 때, 

우리는 적극적인 행복과 소극적인 행복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글의 전개상 소극적인 행복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소극적인 행복이란, 스트레스와 어려움을 주는 환경을 피하는 것, 그것을 통해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자유의 개념에서 ‘일탈’과 아주 비슷한 양상을 띠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적극적인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성취하는 행복, 쟁취하는 행복입니다. 특정한 행위를 하는 것에 있어서 어려움과 불편함이 예상되지만 그것을 무릅쓰고 일을 진행하다보면 얻게 되는 행복 말이지요. 그것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가정을 꾸리면서 개인의 시간을 포기하고, 주말을 내려놓고 연구에 몰입하는 것이지요.


바로 위의 적극적인 행복을 자유의 개념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로 들어가는 것’ ‘의지를 가지고 일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이 교도소에서 탈출해서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의 자유를 십분 활용하여 교도소의 참상을 언론에 알렸고, 은행에서 많은 돈을 인출하였으며, 멕시코 해변에 자신만의 거처를 마련하였습니다. 일탈하여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돈을 펑펑 쓰며 여행만 다닌 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영화에서는 스토리를 쉽게 진행했지만, 사실 위의 모든 일은 위험부담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으며, 자신이 몸소 움직여야하는 불편한 일 또한 있었을 것입니다.)


삶에는 적극적인 자유와 소극적인 자유가 이리저리 뒤섞이게 되어 있습니다. 호기롭게 나서야 할 때가 있는 반면, 물러나서 숨을 고라야 할 때가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하나의 자유만 부풀려서 그것이 절대 자유라고 추구할 때 일어납니다. 무엇이든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하려는 사람이나, 어떤 상황이든 다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여 소극적이 되어버리는 사람도 건강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톡방을 나왔으면 그것으로 자유가 완성된 것이 아니듯, 세월아 네월아 자신의 의지를 시간의 바다에 둥둥 떠내려가게 할 것이 아닌, 자신이 쟁취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십분 활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절대 도망자도 아닌, 절대 주권자도 아닌, 매순간 최선의 자유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필연성은 자유의 반대말이 아닐 수 있으며,
인간은 굳이 동기를 만들어 내는 대신
“내 행동이 곧 나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가장 자유로울지도 모른다.
- C.S 루이스





메인이미지 - 강릉 송정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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