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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Aug 06. 2020

친절을 가장한 훼방

이기적인 것이 차라리 나은 경우

C.S루이스는 그의 글에서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만난 이들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 가장 어울리기에 유쾌한 사람은 아주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내가 아는 어떤 이들은 정말 남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할 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나 남들에게 불행을 안겨다 주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과 자기 연민으로 꽉 차 있다는 데 있었다.”  <<예기치 못한 기쁨>> 홍성사.


처음에 이 구문을 읽었을 때 저는 적잖이 당황한 동시에 그의 명료한 분석에 공감하며 머리를 탁 쳤습니다. 또한 곧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지만, 남을 위해 행동하는 것 같지만, 사람들에게 불행을 안겨다주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1. 과한 걱정과 친절

그 사람은 늘 그의 가족과 그의 친구들을 생각하고 걱정합니다. 때로는 그 걱정이 너무 과해 현실과 동 떨어진 상상을 하기까지 이릅니다. 그러다 그의 지인 중 한 사람이 어려운 일에 처하게 되면 그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발 벗고 나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줍니다. 그리고 도와주면서도 어려운 일들이 추가로 겹겹이 일어나면 어떡할지 또 걱정합니다.


그는 그의 지인들에게 과한 친절을 베푸는데, 그 친절은 애초에 받는 사람들이 바라지도 않았던,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입니다.

 단지 서로 약속을 잡고 가볍게 만나려 했는데 며칠 전부터 기대하는 듯 하는 모습을 보이지를 않나, 요즘 벌이가 좋지 못하여 비싼 음식 보다는 평범한 밥집에 가자고 했더니 자신이 밥을 사겠다며 또 다른 어려운 일들도 도와주겠다고 하지를 않나, 만남을 가진 이후 헤어졌는데 집으로 비싼 복숭아를(알레르기가 있어서 먹지도 못하는데) 보내주지를 않나, 그 사람의 부담스러운 행동 때문에 더 이상 만나기가 꺼려집니다.

 그 사람이 밥을 사는 것도 정말 필요치 않았는데, 과일을 보내줄 필요도 정말 없었는데, 도와주겠다고 끈덕지게 연락이 오는 것도 정말 필요하지 않는데 그는 그칠 줄 모릅니다. 오히려 그의 과한 관심과 걱정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습니다.

 


2. 과한 양보

위와 같은 류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선택을 하든지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 않고 양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양보’에 대해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일 정도지요.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친구와 함께 아이스크림31 가게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여러분은 생각합니다. 둘이서 콘을 하나씩 먹는 것보다 세 가지 맛을 동시에 주문할 수 있는 ‘파인트’를 시키는 것이 비슷한 금액으로 아이스크림을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여러분은 친구에게 파인트를 먹자고 말합니다. 친구는 그러자고 답합니다. 사실 그날 배가 좀 아려서 애초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세 가지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게 됩니다. 우선 여러분이 하나 고르고, 친구가 하나 고르고, 나머지 하나를 뭐를 고를까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여러분 보고 고르라고 자기는 괜찮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하나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아이스크림은 친구가 좋아하지 않는 ‘민트’가 들어간 맛이었지요.
 이제 여러분은 친구와 아이스크림을 먹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먹는 둥 마는 둥 아이스크림에 손을 잘 대지 않습니다. 표정 또한 좋지 않아 보입니다. 순간 친구가 왜 그러는지 의구심이 들지만 우선 아이스크림이 맛있으니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 먹습니다. 절반 정도 먹어 가는데, 친구의 반응이 영 좋지 않아 여러분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왜 아이스크림을 잘 먹지 않는지 물어봅니다. 친구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여러분보고 많이 먹으라며 웃어줍니다. 여러분은 의아한 마음이 들지만 친구가 아무 일도 아니라니 괜찮겠지 하며 그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친구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분위기도 점점 어색해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여행으로 화제를 전환합니다. 2년 전에 그 친구와 갔던 여행을 화두에 올려봅니다. 같이 갔었던 강릉 여행이 참 좋지 않았냐며 친구에게 물어봅니다. 미적지근한 친구의 반응에 좀 더 구체적으로 여행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함께 갔었던 푸르른 바다와 커피향 가득했던 카페, 경포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숙소와 거대한 욕조가 딸려 있는 발코니까지, 그 안에서 즐겼던 추억들을 꺼내며 이번 여름에도 강릉에 가지 않겠냐며 친구에게 제안해봅니다. 그러나 친구의 반응에 여러분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게 됩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여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답했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나 사실 강릉 별로였어. 그때 진짜 더웠잖아. 미리 일기예보 보고나서 가고 싶지 않았어, 나 뜨거운 햇볕 안 좋아하잖아. 그런데 너가 되게 가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같이 갔던 거야. 실제로 그날 너무 더워서 바다에 있는 것보다 그냥 숙소에 있고 싶었는데, 너 혼자 다니게 할 수 없어서 같이 다녔던 거고. 그리고 오늘도 나 컨디션 안 좋거든. 배도 아프고. 그런데 너랑 미리 약속 했으니까.. 그리고 나 민트 아이스크림 못 먹어”


위의 이야기들 속의 과한 걱정, 친절, 양보를 하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진심으로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걱정을 하고 친절을 베풀고 양보를 하는 행위의 원천은 타인의 필요를 명확히 알고 그 필요를 채워주며 타인과 함께 건강한 교제를 하는 것, 즉 이타심에 있지 않습니다. (행위 그 자체는 이타적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이타적인 행위 이면에는 뒤틀린 이기심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냐고요? 바로 어두 컴컴한 자기 자신 속입니다.


그 사람의 내면에는 외로움과 공허가 빚어낸 불안과 떨림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바로 좋아할 줄 모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줄 모릅니다. 그런 그가 혼자서 어떻게 이 가혹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붙잡히는 누구든 무엇이든 붙들고 늘어져야지요. 하지만 그는 이기적일 줄 모릅니다. 그래서 이타적인 행위로서 자신의 고독과 공허를 가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남들에게 관심을 가짐으로서, 잘 대해주면서, 자신에게 있는 것을 주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는 것이지요. 결국 진심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던 그는 타인으로부터 오는 감사와 사랑을 자신을 위로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그는 슬슬 시동을 걸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과 행동을 보일 것입니다.



나를 바라봐줘,
나를 인정해줘,
나를 사랑하고 높여줘,

너 말고 오직 나만






이런 그 사람은 아직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멀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이용하며 기만의 가면을 쓰고 이타적인 행동을 하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이기적 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아야 그 다음에 진심으로 이타적인 마음을 지니고 사랑하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의 진정한 필요와 욕구를 무시로 일관하며 자신의 주장만하는, 그래서 기필코 자신이 갈망하는 완벽한 모습으로 자녀를 양육시키겠노라 주장하며, 자녀에게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다 주는 부모의 모습에서 사랑이 아닌 뒤틀린 이기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물어볼 것 같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냐고 말이지요. 그럼 이렇게밖에 대답해 드리지 못하겠네요.      


저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메인이미지 - Pixabay로부터 입수된 Kranich17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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