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받는 것 또한 두려워하는 당신에게
이 글은 독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저 자신을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 저는 제목처럼 타인에게 상처 주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특히 제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잘 지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일수록 제 마음은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여러분도 이와 비슷한 마음을 품어 보신 적 있으시다면 저와 같이 이 글을 읽어 내려가 봅시다.
우리는 많은 고민을 합니다. 언어와 행동과 관련한 고민들 말이지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가끔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말이나 행동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까?’하고 말이지요. 그런 생각이 고개를 빠끔히 내밀기 시작하면, 우리의 심장은 주눅 들고 저녁 내내 그 생각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워지게 되지요. 어떻게든 그 생각을 잊어보기 위해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SNS를 하고 각종 영상물을 보더라도 불편한 감정은 쉽게 사라질 줄 모릅니다.
(일전에 글에서 다뤘던 것 같지만, 끝없이 밀려드는 생각을 하지 않는 방법은 ‘그 생각’을 이어가며 그것을 정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끊고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활동에 - 그것이 무엇이 됐든 - 완전히 ‘몰입’하고 즐기는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위와 같은 불편한 생각들이 어디서 오게 됐을까요? 저는 ‘타인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는 믿음’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무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다면, 우리는 타인 앞에서 그 어떤 말과 행동도 편하게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사람들 앞에서 충분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 하더라도, 좋은 모습에 집중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는지 늘 고심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비밀 하나를 캐내야 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 더 쉽게 상처를 준다는 비밀 말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가족, 오래된 친구 등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많은 시간을 함께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상처를 주고받았냐 하면, 때때로 자신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때로는 상처를 주고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장악하는 더 큰 무언가(대부분이 분노의 감정이지요)에 의해 의도적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는 수준으로서 말이지요.
당혹스러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누군가에게 분명 상처 입히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결코 완벽할 수 없으니까요. 상처와 관련한 이슈에 있어서는 이미 완벽해질 수 있는 기회는 끝나버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상처 입히고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편한대로 아무렇게나 상처 입히자는 내용의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는 정말 엉망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진정한 관계를 위해서라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아픔 또한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디 위의 말을 자기중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늘 옳으니, 너에게 상처가 되더라도 네게 상처 되는 말을 좀 해야겠어.’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이 사회에서 100% 정답의 생각과 행동양식을 지닌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면 무인도로 이사를 가거나, 화성에다 집을 짓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조만간 또 다른 사람들이 배와 우주선을 타고 입주하겠지만 말입니다.(그러니 100% 정답의 생각과 행동양식을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은 불가능 하단 말씀이지요.)
아픔을 감내하며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은, 타인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것에 대해 고려하는 마음으로부터 말과 행동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 옛 이야기를 들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20대 초반 시절, 저는 게임중독에 빠졌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루 기본 14시간에서 많게는 18시간까지 게임을 붙들었습니다.(이렇게 2년이란 시간을 홀랑 까먹었습니다.) 게임을 열심히 붙들고 지내던 어느 날, 저는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내온 저의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저를 본 그 친구의 표정은 어두웠습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고, 그 친구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럽고 진지한 표정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네 눈빛에서 총명함이 사라졌어.’라고 말이지요. 그 친구는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따로 지적하거나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이 보았을 때 친구에게 생겨난 바람직하지 못한 변화의 핵심을 짚어줬을 뿐이었습니다.
평소 그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자세와 말투에, 그리고 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저의 외면에 대한 지적에 저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친구의 말이 밤새 귀에서 맴돌았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제가 당장에 게임을 끊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의 그 말이 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아주 큰 계기가 되었음을, 지금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이 글에서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기에는 꽤나 무거운 예시로 들렸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허나, 무게는 다를지라도 방향은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정말 상대방을 위해서라면(그리고 그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이, 곧 나에게도 유익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상대에게 상처가 될 말이라 할지라도 전하는 것이 더 나은 일임을 말이지요.
서로간의 잔잔한 애정에서부터 우정 그리고 사랑까지, 우리는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관계 가운데서 이제는 소중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상대방에게, 때때로 우리는 상처 되는 말을 해야 할 상황이 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은 불편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며, 심지어 두렵기까지 합니다.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화가 날 수도 있지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끈끈해지는 관계의 과정' 아닐까요?
이야기를 정리하려 합니다. 앞서 말한 ‘상대의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상대에게 진심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회생활을 할 때 막무가내로 써먹을 수 있는 행위도 아닐뿐더러, 그렇게 하다가는 정서적 에너지를 다 소모해버려 그로기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정말 내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 가는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요.
덧붙여서, 그렇다면 우리는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지게 됩니다. 소중한 사람의 따끔한 이야기는 내면 깊숙이 들어오기 때문에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단지 ‘상처 된다.’는 이유로 그런 말들을 회피하고, 그 말을 해주는 사람을 비난하는지 모릅니다. 허나, 이제는 잘 아실 터이지만 강조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스팔트로 된 길 위로 차를 타고 함께 이동한 사람보다
굽이진 산골짜기를 끝까지 함께 걸은 사람이
훨씬 가깝고 소중한 사람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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