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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틀루이스 Oct 18. 2020

붙잡으려 하면 떠나가 버리는 것들

일상에서 환희를 누리는 법

어느 날, 무료한 일상으로 인한 매너리즘에 빠진 여러분에게 친구가 드라이브를 제안합니다. 그렇게 핫 플레이스를 잘 아는 친구와 함께, 그의 소개로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호수의 경치를 자랑하는 멋진 카페에 가게 되었다고 상상해봅시다. 


여러분은 카페에 들어섭니다. 내가 딱 좋아하는 음악, 아무렇게나 찍어도 사진이 잘 나오는 조명, 향긋한 커피와 입에서 살살 녹는 디저트까지. 게다가 모던한 인테리어와 창문 넘어 보이는 호수는 얼마나 인상적인지 두 세 시간이 아니라 하루 종일 있고 싶어질 정도로 마음에 듭니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친구의 초이스에 따봉을 계속해서 날려 주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기쁨’ 내지는 ‘환희’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 감각들은 우리의 가슴과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버리지요.




몇 주의 시간이 흘러 여러분이 일상에서 무료함을 느끼게 됐다고 해봅시다.(미안합니다.) 뭔가 심심하고 부족해 보이는 일상으로 또다시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이럴 때 일수록 변화를 줘야 한다고, 예전에 느꼈던 기쁨과 환희를 다시금 느끼며 리프레쉬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기대에 잔뜩 부푼 맘으로 이전에 갔었던 ‘핫플 카페’에 또다시 찾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과 같은 감정이 들지 않습니다. 다 좋기는 좋지만, 인테리어와 경치도 다 좋고 사진도 잘 나오고 커피와 디저트도 맛있지만, 이전의 자신을 압도하던 그 환희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마다 취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그 예시를 한 번 분류해보겠습니다. 


1. 이전의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시간까지 내서 멀리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에는 분명 아깝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진을 찍고, 디저트를 더 맛있게 먹어보려 하고, 더 상기된 목소리로 이것저것 좋다며 칭찬합니다.


2. 이전의 그 날만 유독 즐거웠던 것이라 자신을 타이른다. 

일상에서도 현실적인 대안을 잘 찾는 이런 유의 사람들은 금세 상황에 적응하고 더 이상 실망하지 않도록 자신을 설득할 줄 압니다. 그들은 ‘카페는 카페일 뿐이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굳이 이곳까지 찾아올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3.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문제를 찾는다. 

변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아니면 미세한 차이가 있는 정도) 카페가 변했다고 문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음악이 예전에 들었던 음악이 아니라며, 커피가 조금 싱거워졌고, 케이크 맛도 변했으며, 창문을 열어놔서 찬바람이 들어와 산통 깨졌다고 말하곤 합니다.


**위의 예시들은 특정 사람을 평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또한 단지 예시일 뿐이니 그렇게 중요도를 갖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품은 마음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래와 같습니다.  


그들이 기쁨을 누리지 못했던 이유는 ‘기쁨 그 자체’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카페를 갔을 때와 두 번째로 갔을 때의 차이점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마음가짐, ‘기대’입니다. 


우리가 기쁨을 누리는 것은 기쁨이라는 감각 그 자체를 관조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쁨을 누리게 만든 대상을 바라보거나 누렸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카페를 갔을 때는 마주하게 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바라보았고, 그대로 누렸으며, 그대로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카페에 갔을 시에는 감각을 먼저 느끼려 했고, 감각을 느끼려 하는 생각이 대상들을 온전히 관조하는 것을 방해했으며(보고, 먹고, 만지며 느끼는 행위들), 결국 감각도 흐지부지되고 행위도 흐지부지 되는 결과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위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순서는 이렇게 됩니다. 


A. 환희를 느끼는 단계

특정 대상이 존재 -> 그것을 관조함 -> 그것을 향유하고 누림 -> 그로 인한 기쁨     


B. 환희를 느끼지 못하는 단계

특정 행위와 거기서 느껴지는 감각을 상상(여기서 이미 옅은 감각이 발생함) -> 그 상상으로 인해 자신이 실제로 하고 있는 행위를 온전히 관조하며 향유하지 못하게 됨 -> 실망, 아쉬움, 애매한 상태, 허무함 등등 




그렇다면 두 번째로 카페를 방문했을 때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그러면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은, 앞선 질문,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자체가 벌써 아이러니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 행위를 한다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감각을 얻고자 하던 계획을 포기하고 카페에 간 그 자체와 카페에서 이뤄지는 모들 활동들 그 자체에 몰입하면, 예전과 같은 기쁨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처음처럼 그것이 임팩트 있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처음이란 것은 이전에는 경험해본 적 없는 것을 새롭게 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시너지 효과가 감각을 팝콘처럼 크게 튀겨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어린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매일 똑같은 놀이를 하면서도 즐거워하는 것처럼(요즘은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줄어들어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만), 여러분도 어떤 특정한 기대감 없이 놀이와 휴식과 활동을 한다면 어린아이들처럼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쁨의 노예가 아닌,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며. 



P.S - 이 글은 C.S루이스가 이미 이전에 했던 말을 현대식으로 옮겨 본 것입니다. 부족한 저의 설명에 아쉬움을 느끼신 분들은 C.S루이스의 서적들을 읽어보시기를 적극 권유드립니다. 




메인이미지 - Pixabay로부터 입수된 Free-Photos님의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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