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소품] 문지기와 순례자

관계의 환상을 대신한 '미완'의 사랑

by 솔깃설깃


문지기의 ‘황야’는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요새를 정북 방향으로 등지고, 석회질의 돌산을 넘어 넓게 펼쳐진 관목지대에 있었다. 그는 ‘황야’라고 자신의 영토를 소개했지만, 희귀한 선인장이 자생하는 일부 건조지대의 초입을 지나면, 관목으로 이루어진 숲길이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교차하는 야트막한 구릉을 따라 여러 갈래의 오솔길로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매자나무와 은목서, 종려나무와 선인장들이 색다른 각각의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거대한 정원과도 같았다.


황야의 서남쪽 지평선이 끝나는 지점에는 순례의 마지막 종착지인 해양 요새 도시가 위치해 일몰 이후의 따뜻한 불빛들이 오렌지색 아지랑이로 피어났다. 그렇기에 신심 깊은 이들에겐 그토록 찾아 헤매던 ‘궁극의 절대’를 향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호기심 많은 이들은 일부러 길을 돌아서 둘러 갈 만큼, 문지기의 황야는 헌신적으로 가꾸어져 있었다. 그러한 헌신은 어떤 대상을 향한 충성심이 아닌, 행위 자체의 결연함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내가 그곳에 갔을 때는 따듯한 겨울의 막바지였기에, 땅에 낮게 가로지르며 자라나 올망졸망 터뜨려 올린 오이포르비아 그란디코르니스의 노란 꽃잎들이 관목들의 음울한 풀색을 환기하며, 보기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문지기는 ‘황야’의 주인이었지만, 어떤 직책이 있거나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는 한 번도 알려진 적 없던 이곳에 절로 이끌려 흘러 들어왔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두고 말하길, 오랜 항해 끝에 다시는 돛을 펴지 못한 폐선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황야’는 순례자들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순례길은 아니었기에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적막한 길 그 자체였다. 그러니 내가 그곳에 방문하게 된 일을 설명해야 한다면, 어떤 우연의 투명한 고리가 내게 걸려들어 와서 나 또한 그처럼, 이곳에 대해 들은 바 없이 절로 따라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그는 관목 숲길 사이로 찬찬히 걸어 들어가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구릉의 완만한 능선을 따라 내려가자, 그는 짧은 반곱슬머리를 덮어 눈 바로 위까지 가리고 있던, 직선으로 된 챙모자를 벗으며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검은색 쇼트 재킷 아래에 멜빵 달린 검은 팬츠를 입고, 그의 발 모양에 맞게 잘 길들인 짙은 밤색의 소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내내 시가를 들고 있었기에, 리넨셔츠 소매를 통과한 연기는 이끼 낀 안개 숲 마냥, 그의 가슴 쪽까지 피어올랐다.


“쉬어가실 곳으로 안내하지요.”


햇살에 오랫동안 그을린 짙은 구릿빛 얼굴의 그는 오른쪽 팔을 펼쳐내며 오솔길로 향하게 했다. 그의 말은 이 세계의 호출 벨이라도 되는 것처럼, 곧바로 하늘이 검붉게 물들었다. 나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반드시 어딘가에서 오늘 하루의 안식을 구해야 한다고 강렬하게 믿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신념 같은 욕구였다.


그의 오두막은 황야와 성(城) 사이의 옹벽 지대에 있다고 했다. 그곳에는 수 킬로에 달하는 구간에 걸쳐 수십 개의 옹벽이 있었고, 각각의 옹벽은 방향을 달리하여 지형을 활용한 수십 개의 해자(垓子)와 어우러져 있었다.


우리는 일 년 중 가장 밝게 뜬 만월을 만났기에, 달빛에 의지하여 수월하게 해자들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숱하게 던져놓은 덫을 피하기 위해서는 투명 망토를 입은 적군을 상대하듯, 사방으로 스텝을 밟아야 했다. 그는 데뷔탕트를 주최하는 호스트처럼 나를 인도했고, 우리는 종종걸음을 걷거나 성금성금 뛰어넘으며 달빛 아래의 연인처럼 서로의 몸에 점점 더 밀착해 갔다.

촘촘하게 늘어선 웅덩이와 덫들이 잦아들 즈음, 매자나무가 양측으로 늘어선 호젓한 오솔길 입구에 접어들었다. 어디선가 은목서 향기가 풍겨온다고 생각하는 중에, 그는 내게서 한두 걸음 떨어져 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늘 밤만 여기서 주무시는 겁니다.”

그가 말하자마자 길 끝에 작은 오두막이 나타났다. 그는 계단 세 개로 이루어진 작은 포치 앞에 나를 올라가게 하며 말했다.

“하루 묵어가기에 필요한 것은 거의 다 갖추어져 있을 겁니다.”

이어 그는 내게 등을 돌린 채 창가로 가서 서며, 달을 향해 당부하듯 말했다.


“일어나시면, 원하시는 곳으로 가세요. 아침엔 해자가 없을 겁니다.”

“해자가 없다니요?”

“이곳은 밤과 낮의 주인이 다릅니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많은 옹벽 끝에는 무엇이 있나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당신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지키고 있는 건가요?”

“지켜지고 있다고 믿지요. 그 무엇도 이곳을 함락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함락되는 것이죠?”

“마법사, 선생, 학자, 소작농, 주정뱅이, 창녀, 사기꾼……. 정말 많습니다. 한마디로 왕국

에서 보내진 짐승들이죠.”

“병정들이 아닌가요?”

“이곳에 침습하려는 것들은 군대가 아닙니다. <어린 짐승>의 마음이지요.”


그는 쇼트 재킷을 벗어 테이블에 던져두고 침대 발치로 와 무릎을 꿇더니 침대 아래에서 꺼낸 트렁크를 열어 레이스가 달린 아이보리색 리넨 로브를 침대에 올려놓았다. 어째서인지 오두막은 화덕에 불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달궈진 온기로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그는 풍성한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앞섶의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선 나를 향한 채 뒤로 한걸음 물러서다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다시 다가와 나에게 입을 맞췄다. 어쩐지 그의 입술에서는 생경한 단맛이 났다. 초록 레몬을 뭉근히 끓여 졸여낸 단맛, 말라죽은 느릅나무껍질을 버섯 우린 물에 달여 만든 떨떠름한 단맛, 한겨울 골 깊은 샘에서 퍼다 올린 따가울 정도로 차가운 물의 아린 단맛. 그의 입술은 그런 맛들을 하나씩 준비해 말렌카 케이크처럼 겹겹이 층을 세워 만든 달콤함이었다.


아무래도 난, 그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았다. 그의 영토 안에서라면 무엇이라도 꿰뚫어 볼 수 있었기에, 스스로에게 놀라 얼어붙은 나에게 그는 달래듯 말했다.


“여긴 네가 오래 머물 곳이 아니야. 해가 뜨거든 떠나. 뒤돌아보지 말고 곧장.”

나는 그에게 다가가 목에 팔을 걸고, 흐린 청갈색 눈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이곳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은 것이에요.”


그는 그럴 줄 알았지만 의외라는 듯, 더군다나 무척 곤란하지만 그럼에도 숱하게 겪어봤기에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문지기인걸, 나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네가 여기까지 헤매며 들어왔기에 잠시 쉬어가게 한 것뿐이야. 나는 누구에게도 가지 않아. 그저 맞이하고, 지킬 뿐이야. 이 회색의 중립지대 안에서 아니, 안과 밖의 경계에서 말이지. 나는 머무는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아.”

“감자와 밀을 심고 닭과 당나귀를 키우며 이 오두막에서 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요. 여긴 모두 당신의 땅이쟎아요? 우리에겐 작은 밀알씨와, 어린 병아리 몇 마리만 있으면 돼요. 난 당신과 함께 해자들을 모두 메우고 옹벽도 무너뜨릴래요. 우리에게 그런 것들은 필요 없어요.”


“너는 평생 순례길만을 걸어왔어. 넌 그렇게 태어났지. 그 길의 끝이 바로 이 산 너머에 있어. 네가 그곳에 이르지 않으면, 넌 태어난 적도 없게 돼. 너의 안식은 이 산을 넘어간 곳에 있어.”

“당신도 문지기로 태어나지 않았죠. 그런데도 여기 있잖아요?”

그는 말이 없었다. 언어를 배우지 못한 갓난아이처럼 텅 빈 눈빛으로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처럼 비탄에 잠겨있었기에 나를 보지 못했다. 그는 일종의 결말로만 말할 수 있었고, 종료된 함묵으로만 표현할 수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에게 무엇도 요청할 수 없었기에 황망한 마음으로 그를 보내야 했다. 서러운 마음이 목구멍 위로 넘실댔지만, 굿 나잇 인사로 누름돌을 삼듯 눌러 삼 겼다.

“잘 가요! 당신. 돌아가거든 잘 자요!”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키보다 작은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벗어 둔 재킷을 손에 쥐고 목을 숙여 문을 넘어서자, 달빛이 그의 어깨 위에 던져진 은모래 한 줌처럼 부서졌다. 부서진 달빛 가루가 닿은 그의 몸뚱이에 빛의 하이라이트가 조사(助射)되자, 그의 심부(深部)가 설핏 드러났다.


그의 등에서 아랫배에 이르기까지 몸통 전부는 공허의 구멍으로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은 공백이었지만, 거울처럼 이 세계를 반사해 냈다. 그가 비춰낸 오두막 안에는 내 모습이 있지 않았다. 거의 투명에 가까운 베일의 엷은 막(膜)이 바깥과 그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분리하며 지탱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가 걸어 나간 곳에는 그의 그림자만이 땅 위에 희미한 음영을 드리우며 오두막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문득, 내가 가려던 곳을 기억해 냈다. 그곳의 이름은 ‘오를 수 없는 산’, ‘함락할 수 없는 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