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소품] 도르레

'한 번도 잃어 본 적 없는 것'과 '잃어버린 기억'

by 솔깃설깃



[작가노트]

“18세기 안달루시아의 한 농가"에 여행객과 그의 그림자가 찾아옵니다. 이 이야기는 현실의 일상성보다는, 어떤 <심연의 도르레>에 초점을 맞춘것으로, 읽어내는 분의 해석으로 글의 의미를 맺어내고자 합니다.






수확을 앞둔 황금빛 겨울 밀과 이제 막 자라나는 청보리밭 위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삽과 괭이를 챙겨 집으로 들어갈 채비를 했다. 마을 어귀의 돌십자가 쪽을 향해 허리를 펴 올리자, 밀밭 사이에 희미한 기척이 아른거렸다. 챙모자를 벗고 자세히 보니, 해를 등에 진 무엇이 좌우로 흔들리며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동시에 방금 풀 벤 자리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올라와 잠시 머물렀다.


나는 잠자코 기다리며 두 손을 비볐다. 손에서는 어느새 마른 흙들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그것은 아주 천천히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한쪽 축이 무너진 모양으로 휘청이고 있었는데, 점점 모습이 드러나려는 순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먼저 도착한 칼새들이 귀소 하며 울어대는 것이었다. 한쪽 발끝을 세워 툭툭 땅을 짚어내고 있노라니 마침내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석양이 붉은 빛으로 실루엣을 밝혀내자, 키 큰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손을 크게 머리 위로 흔들며 살가운 인사를 했다. 말이나 종자 없이 혼자서 떠나온 여행객이었다. 그리고 이어 ‘아......’ 하는 작은 탄성이 속으로 터져 나왔다. 동시에 입안이 텁텁해졌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림자를 지고 온 자였다. 그림자는 절룩거리는 인사로 배시시 수줍게 웃었다. 나는 아마포 손수건을 꺼내 목덜미를 닦았다. 뭐라고 말을 시작할지 몰라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는 차에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그림자 쪽이었다.


“잃어버린 것이 있어요.”

그림자는 새의 날갯짓을 손으로 지어 말했다. 남자는 그림자를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개의치 않는다는 듯 사람 좋은 웃음으로 입을 이죽거렸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것입니까?”

내가 물었다. 그림자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렸다.


“저런......”


나는 조용히 발아래로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림자가 자기 ‘이야기’를 모른다는 것은...... 아니, 단정하긴 일렀다. 해가 지평선으로 떨어지려 하자 남자는 다급히 그림자를 제 등 뒤로 가리고 내게 말했다.

“갈 곳이 따로 있습니다. 잠시 묵을 여인숙이 있다면 알려.......”


칼새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머리 위에서 울어댔다. 나는 새들이 마을 건물 틈의 둥지로 들어가길 기다리느라 그에게 하늘을 가리키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할 수 없다는 듯 싱겁게 웃었다. 그러고는 조끼 주머니 안에 든 것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회중시계나 인장 반지, 작은 병에 담긴 물약 같은 것을 꺼내보고 조끼 이곳저곳의 비밀창고처럼 만들어 둔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는 이어서 올리브 나무 지팡이를 휘두르며 칼새들을 쫓아내었는데, 그가 크게 들썩일 때마다 맵시 좋은 망토를 꼭 붙든 그림자는 불안한 기척으로 납작 엎드려 있었다.



“여인숙이라면, 옆 마을까지 가셔야 하는데 말입니다. 여긴 해가 일찍 떨어지는 곳이라 금새 어두워집니다. 저희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새 떼를 쫒느라 찌푸린 얼굴을 금새 펴내고 히쭉히쭉 웃으며 대꾸했다.

아! 예. 좋습니다. 좋고 말고요.”


그는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입을 다시며 말했다.

“세비야에서 가져온 시가가 있지요. 그것을 사례로 드릴 수가 있답니다. 식사를 좀 부탁드리고 싶은데...... 들판으로만 걸어온 지 사흘째라 말입니다.”


남자는 확실히 피곤해 보였지만, 그을은 피부에는 윤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림자는 팔다리가 앙상하고 얼굴빛은 수척했다. 그러면서도 남자의 등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그의 등을 부여잡고 있었다. 게다가 손으로 말을 지어 보이는 그림자라니...... 나는 그림자를 흘낏흘낏 쳐다보았지만, 그림자는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는 것 말고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보다 한 발 더 앞장서서 옷에 붙은 검불들을 털어내며 걸었다. 남자는 한 번씩 작은 돌에 미끄러지며 묵묵히 나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 올리브 나무 사이를 지난 후, 보리밭 끝에 있는 하얗고 둥근 덩어리 같은 우리 집이 시야에 들어오자, 남자는 들떠 말하기 시작했다.


“유독 빨간 기와를 올리셨군요. 석회칠이 깨끗한 걸 보니 최근에 한번 손을 보신게죠?

남자는 감탄하며 집안으로 들어서 둘러보다가 내게로 와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안뜰이 굉장히 넓네요! 그런데 우물은 어디 있습니까?”

“저희 집은 우물이 없답니다. 마을의 북쪽 어귀에 우물이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물을 채워야 하니, 함께 가보시죠.”

“아하...... 재미난 집이네요?”


남자는 신이 난 듯 헛간 쪽으로 가더니, 새끼 당나귀의 등을 툭툭 치며 쓰다듬었다. 어미 당나귀가 성질을 부리러 오기 전에 그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었다.



“아침에 먹던 콩 수프가 있습니다. 치즈와 포도주도 조금 있는데 드시지요.”


남자는 낡은 사각 가방을 탁자 옆에 두고 체면 차리지 않고 급히 식사를 시작했다. 조끼 주머니에는 잡동사니가 잔뜩 들어 있었지만, 가방은 납작한 것이 무엇이 들었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남자는 꺼내놓은 치즈와 포도주, 둥근 밀 빵을 남김없이 다 해치우고선, 수프 그릇 아래 남은 돼지비계 몇 조각도 깨끗이 비워냈다. 그림자는 그의 등에서 스스로 내려와 부엌 입구에 있는 의자에 다소곳이 앉았다. 문득 밀 추수를 앞두고 내일 새벽부터 움직일 요량이라 서둘러 잠자리를 준비해야겠다 싶었다.


“저는 일찍 자야 합니다. 부엌을 나가서 오른쪽에 작은 침실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물을 길으려면 새벽에 나가야 합니다. 바로 주무세요.”


남자는 몸을 일으켜 의자 한쪽에 두 손을 짚어 체중을 실으며 말했다.

“좋으신 주인분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주님이 갚아주시길!”


그는 기우뚱한 팔자걸음으로 부엌에서 나갔다. 그림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목을 끄덕이며 그에게 인사한 후, 아궁이에 내일 먹을 수프를 초벌로 끓였다. 작은 나뭇가지들을 하나씩 넣어가며 불을 맞추자, 틱틱거리는 불티가 튀어 올랐다. 혹여 열매나 씨방이 붙은 것들이 섞여 있나 싶어 매끈한 것을 골라 넣었는데도 불티는 조금씩 점점 더 거세어졌다. 그러던 것이 급기야는 쉴 새 없이 좌우로 휘어지는 타오르는 불꽃이 되었다. 불꽃의 너울은 점점 모양을 갖추더니 이윽고 불의 환영이 나타났다.


“참으로 오랜만 아닌가?”

“저를 아십니까?”

"겨울이 지난 지 오래되었어"

"따뜻하고 짧은 겨울이었죠."

그래서야. 이젠 선택할 수도 없어.”

선택하다니요?”

“내일 그림자는...... 것이다..”

“네?”

“너에겐.......”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 심지까지...... 고 있는 자이지.”

불꽃의 환영은 짧은 전언 끝에 고요한 불의 심지 속 주황빛으로 납작하게 흡수되었다.


나는 설핏 든 꿈인가 싶어 불꽃을 한참 노려보았다. 불길은 수프를 끓이기에 딱 좋은 정도로 작고 금새 꺼질만은 아닌 정도로 단단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어머니는 종종 한밤중의 아궁이를 조심하라고 하셨다. 그것은 아궁이가 아니라 불꽃의 환영인지도 모르지......



나는 서둘러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곯아떨어지느라 들어본 적도 없었을 새벽의 소리들이 선명하게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당나귀들이 ‘푸르르’ 숨을 몰아붙이는 소리 사이로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낮게 깔리자, 심장 가운데가 웅웅거렸다. 도무지잠을 이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몸을 뒤척이고 있노라니 먼 숲의 나뭇가지 부딪히는 소리가 마당까지 도착해 바스락거리며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몇 시간 뒤면 새벽부터 밀을 베어야 한다. 내일 많이 베지 않으면, 하루 새에도 머금은 물기가 달라질 수 있는데...... 오늘 같은 날 손님을 치르다니 제정신인가? 이제 곧 동이 트기 시작할 것이다. 보름달 밤에 그림자를 집에 들이는 호의를 베푼 것이 잘못인지도 모르지. 그 남자에게 업힌 그림자는 여자가 분명한데...... 칼새들의 말을 읽었던 것인지도......


‘똑똑똑’ 낮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피곤에 절은 몸을 금방 일으켜 내지 못했다. 그러자 문을 한번 밀어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잠긴 문을 확인했는지 ‘쾅쾅쾅’하는 거센 주먹질로 문을 두드렸다.


“아니, 무슨 일......?”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림자가 내 방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림자는 조용히 내 침대 발치로 와 섰다. 그러더니 자루 같은 펑퍼짐한 튜닉을 훌렁 벗어 버렸다. 그림자는 예상대로 여자였다. 그리고 그림자의 몸은 어둠 속에 더 짙은 어둠의 형체로 공간을 지우고 있었다. 하지만 눈만은 유독 유리알처럼 반짝였기에 그것이 칠흑 같은 어둠의 사각지대가 아닌 그림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림자는 창가로 가 창에 제 몸을 맞추더니 창 전체를 몸으로 덮었다. 그러자, 그림자의 몸은 달빛을 투과시켜 환영과 같은 무늬를 마룻바닥에 그려 놓았다. 그것은 고대의 문자 같기도 하고 이국의 음표 같기도 했으며, 유력 가문의 문장(紋章) 같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도통 알아볼 수 없는 그림자의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손으로 말을 지어 보였다.

“그를 깨워주세요.”


나는 그림자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남자를 깨웠다. 그림자는 하룻밤새 더 가늘어져 있었기에 조바심이 일었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남자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일어나 침대 위에 몸을 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그림자가 죽어가고 있어요. 우물로 안내하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양들도 자는 시간인데요?”

그에게는 설득이나 설명이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낮게 명령하듯 말했다.

“일어나 따르세요.”


그는 허둥지둥 일어나 망토를 걸치고 올리브 나무 지팡이를 챙겨 나를 따랐다. 남자는 덩치 좋은 사내였지만, 몸의 축이 무너져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림자와 몸이 맞물려 낸 절뚝임 같았다. 그런데 걷다 보니 그 발걸음 소리에 맞춰 우리도 함께 절고 있었다. 젖은 풀숲을 헤치는 올리브 나무 지팡이도 한 박자 늦게, 새벽 공기를 ‘딱딱’ 흩트리고 있었다.



집에서 마을의 경계까지 걷는 동안, 낮은 구릉을 몇 개 지나자, 작은 성당이 오도카니 서 있는 언덕에 도착했다. 남자는 내내 말이 없었다. 얼굴은 파랗게 굳어져 식은땀을 연신 흘리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는 그의 곁에서 조용히 뒤따르며 땅을 보고 걸었다.


“왜 여기에 오셨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성당이 바로 보는 위치에 서며 나는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물었다.


“그...... 저는 떠나왔었죠. 그 그저 떠나야 했으니까요. 저...... 여기저기...... 그러니까 오랫동안 여길 저 길 들러서 여기로 온 겁니다.”

“여기가 당신이 오려고 했던 곳이 맞나요?”

“저는 그저 하룻밤 묵어 가는 것뿐인데요. 당신을 우연히 만난 거고, 지금은 영문도 모르게 이렇게......”

“그럼 다음 목적지는 어딥니까?”

“다음 마을이겠지요.”

“그러면 그다음은 또 다른 마을입니까?”

“저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요?”

그는 추궁당해 억울한 듯 말했다.


그림자는 점점 옅어진 색으로 투명해진 몸이 되더니, 우리 둘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우리 곁에서 서너 발짝 떨어져 춤을 추었다. 그것은 수피교도들이 빙글빙글 돌며 추는 춤이었다. 좀 천천히 춘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남자는 그림자가 춤을 추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붉어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저는 억울하다고요. 너무 억울합니다.”

“무엇이 그리 억울합니까?”

“난 할 만큼 했답니다. 지킬 것도 있었다고요...... 하지만 결국 약혼반지까지 빼앗겨 버린...... 더 이상......”

그는 주저앉아 머리를 무릎에 파묻고 메마른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요.”

“그리고 그림자가 죽어가고 있죠.”

내가 이어 말했다.


나는 그를 부축해 성당의 뒤편으로 안내했다.


“당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아마 이걸 겁니다.”

“이건 우물인가요?”


그가 먼저 하얀 석회로 덮인 우물로 다가가며 말했다. 우물 위에는 고정쇠가 달려있었고 거기엔 도르래가 연결되어 두레박을 드리우고 있었다. 두레박은 두껍고 무거운 덮개 위에 놓여있었기에 그는 두레박을 내려놓고 우물의 덮개를 열어보았다. 덮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밀어붙이는데도 꿈쩍 않는 덮개를 보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는 나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도통 안 열리는데요? 같이 밀어봅시다.”

“저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선택하다니요?”

나는 인내심이 바닥나는 중이었다. 이어 밀밭에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나도 몰라! 알 게 뭐야. 내 밀밭에는 내가 있어야 하는 것 말고는 나도 아는 게 없어.”


남자는 망토 안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몸을 떨었다. 그러자 그림자는 춤사위를 멈추고 남자의 곁으로 와서, 그와 눈을 맞추며 나란히 섰다. 그는 먼 곳을 응시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어느새 그의 눈의 탁기는 차츰 맑게 개었다. 새벽안개의 뿌연 땅구름도 물러나 있었다. 남자는 우물 앞에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깊이 들어마셨다.


“그래요. 해 보지요.”


남자는 망토 아래 풍성한 소매 단을 둘둘 말아 걷어 올리고 뚜껑을 밀쳐냈다. 송아지 가죽 신발에 흙이 파고들었다. 굵은 힘줄의 잔 요동이 달빛 아래서도 도드라져 보였다. 이윽고 뚜껑이 조금 젖혀지자 작은 틈으로 우물 안이 드러났다. 남자는 힘쓰던 것을 멈추고 틈에 눈을 대고 염탐하듯 말했다.


“뭐가 있을 리가......”


그는 어긋난 까치발로 내려다보더니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내 곁으로 와서 양팔을 가로로 저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보며 어깨를 붙잡았다. 남자의 입가에는 한쪽으로 침이 새어 나와 있었다. 그러자 그림자가 그와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림자는 입에 머금은 빛의 방울들을 터뜨리며 말을 지었다. 그것은 안심하라는 말 같았다.


“저자는 당신이 보이지 않는 건가?”


내가 묻자, 그림자는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무게를 싣는 걸음으로 우물가로 가서 섰다. 그림자는 젖혀진 덮개의 작은 틈을 향해 몸을 기울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일순간 뜀을 뛰어 몸을 던지자, 빨려들 듯 아래로 사라졌다. 그러자 남자는 손에 도르래를 쥔 채 옆에서 벌벌 떨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여러 차례 깨물어 보았지만 소용없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쥐어 짜내듯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나는 남자를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그의 시선에는 초점이 없었다. 내 뱃속에서는 무언가 당겨진 불씨의 뜨거움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 입에서는 알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친구여 새벽을 깨운 것은 내가 아니야”


그 말을 뱉고 나자, 나는 심장이 발길질하기 시작하는 북받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이건 보름밤의 미치광이가 꾸는 꿈속이야!”


나는 길을 내달려 쏜살같이 언덕을 내려갔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마을을 지나, 밀밭을 건너 황야의 지대로 사라져 간 작은 점이 되었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뱃속에서 끌어올려진 긴 울음이 회보랏빛 하늘을 향해 메아리칠 뿐이었다. 문득 멈춰서 내 손의 묵직함을 쫓아보니, 두레박을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무게만큼 두레박은 짙은 암갈색으로 푹 젖어있었다. 축축한 것에 손이 곱아들자, 발끝까지 감각이 살아났다. 발에 채이는 것이 지평선을 향해 누워 있는 올리브 나무 지팡이라는 것을 알아볼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