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것의 어느날
내 기억 속에는 묘한 장면 하나가 있다. 핀라이트를 받고 선 무대처럼 비현실적일 만큼 평평한. 그러나 명암의 단차가 기이한 입체감을 돌출시키는 네모난 공간 속, 기억 말이다.
적산가옥의 부엌은 5촉 전구 하나가 시커멓게 그을린 공간을 간신히 밝히고 있다. 크다란 물항아리가 벽에 붙어 놓여있고, 키 높은 나무 선반이 부엌문을 향해 가로지른다. 투박한 나무 살, 유리 없는 창에는 도막 난 빛이 한 뼘 남짓 매달려 있다. 헐겅하게 빗장 거는 부엌 문 틈엔 수시로 삭풍이 드나든다. 벽에 걸린 연탄 보일러는 빨간 플라스틱 주머니에다 물을 삶는다.
그리고 그 옆은 지날 때마다 한 번씩 몸을 꼬게 되는 엄마의 비밀창고가 있다. 찬장이라는 이름이었다. 꽃무늬가 아롱진 유리는 보여주지 않지만 보여낸다. 무엇이기를 바라는 것들을 담고서 말이다.
“여긴 부엌. 물 떠오는 곳. 엄마가 밥이랑 국을 끓였어.”
그때야 어린것은 부엌의 이름에 부엌의 기억을 얹는다. 어라? 갑자기 배가 아프다. 힘이 없고 늘어지는 몸. 어느덧 밖은 일몰을 지나 어둠이 완연해졌고, 부엌은 암실처럼 어두워졌다.
먹먹해진 어둠은 맹렬한 어지러움을 토해내며 몸을 통과했다. 바닥에 달걀후라이 마냥 납작 퍼졌다.
왁작지껄한 소리와 함께 할매가 쪽진 머리로 항아리에서 물을 퍼낸다. 바가치에 쌀을 씻는가 하면, 시래기를 된장물에 얹는다. 할매의 잔기침은 선반에 항아리에 아궁이에 층층이 들러붙는다.
발바닥에서 머리로 꿰뚫는 무엇이 쏘아진다. 얼굴이 뜨거워져 깨어난다. 오렌지색 막이 눈 앞에 붙어 있다. 여즉 선연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치운다. 엄마......? 그렇지! 엄마는 없다. 부엌을 한나절이나 뒤지고 있는 동안, 엄마의 눈이 머문 적은 없었던 거다.
찬장 앞에 선다. 아장아장과 다박다박 그 사이의 리듬으로, 고개를 뒤로 다 젖혀도 꼭대기는 보이지 않는다. 나무에 오래 묵어 비릿해진 짠내가 반들반들 이렁져 있다. 입이 탄다.
혀뿌리부터 말라 있다. 항아리. 항아리! 스뎅 국그릇으로 몇 번이고 퍼다 마신다. 골딱골딱 비명지르듯 목구멍은 물을 당겨 내린다. 할매들......아니, 엄마......? 엄마! 엄마! 어둠이 목소리를 잠궈냈다. 돌바닥의 냉기가 맨발을 타고 올라온다. 신발도 양말도 없었다. 몸에 헐거운 원피스 안, 빤스도 없다. 엄마도 없다.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 작은방으로 간다. 반질반질한 나무 의자 하나를 고른다. 모로 세워 등을 받혀 질질 끌어낸다. 배워본 적 없지만 이미 알았던 몸짓으로. 한발씩 올라가는게 익숙치 않다. 떨어지면 다친다는 것을 아는 모양인지 찬장의 옆구리를 솜씨 좋게 잡아 제 몸을 받친다. 이윽고 의자 위에서 몸을 펴내니, 찬장 머리 속 매케한 먼지가 내려다 보인다.
그런데 먼지가 대수가 아니었다. 찬장 머리에는 완고한 미지가 있었다. 분유라고 써 있는 깡통 하나, 전지분유라고 써 있는 봉다리 하나. 깡통의 빨간 띠 위로 볼이 통통한 아이는 옷을 입지 않았다. 눈이 반짝였다. 아기...... 아기? 어린 것은 분유통을 두 손으로 꼭 쥔다. 한참을 그러다가 글자를 읽는다. 나는 부엌의 허공을 노려보았다. “내가 이만큼 정확히 읽을 줄 아는 것을 아무도 모를거야.” 왠지 자신감이 생겼다. ‘남양분유’, ‘전지분유' 노랑 고무줄로 꽁꽁 싸맨 전지분유는 자신이 없다. 남양분유의 뚜껑을 연다. 손에 한 줌 쥐어 입에 털어 넣는다. 침이 끈적해진다. 또 털어 넣는다. 입에 묻지 않게 하려고 입을 아주 아주 크게 벌린다. 입을 다물때는 코에서 분유 가루가 품품 날린다. 입 안 가득 끈적하고 되직하게 달다. 침으로 뭉쳐져 딱딱 소리가 나며 끊어진다. 쫄깃해진 반죽을 꼭꼭 씹는다. 이건 밥이야? 과자야?
"애기 "
"밥......"
웅엉대던 할매들은 저만치 멀어진다.
"어떤 아기가 이런 맛있는 것을 먹지?"
......
"나는 아기가 아니야."
뜨거운 것이 발끝을 향해 천천히 끼얹어진다. 분유통에 묻은 가루들을 털어 깨끗하게 해놓고, 아무 일도 없다고 항변하듯 제자리에 그것들을 놓아둔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고 이마에 땀을 닦았다.
“**야!”
엄마 목소리? 엄마다! 천둥소리 같기도 했다. 부엌의 빗장걸이를 열고, 마루로 부리나케 달려 나간다. 빗장문의 덜그럭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마당의 침묵이 먼저 와 덮친다. 파리한 달빛이 나를 노려본다. 정적 뒤에 숨은 귓것들이 나오기 전에 다마에 불을 켜야한다. 마루에 쿵쿵거리는 소리를 찍으며 가로지른다. 아장아장과 다박다박 사이의 다급함으로.
겨우 꼿발로나 닿아질 전기 똑딱이를 손으로 더듬는다. 뒷간의 널판 문과 마루 뒤 안방 문 사이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것들의 숙덕임이 찰방하다. 발과 종아리, 허벅지를 휘감는 침묵. 침묵을 가장한 윽박소리란걸 모르지 않는다. 빈 개집 앞에 밥그릇이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한다.
아마도 전구의 필라멘트가 흔들리던 그 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