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과 연락이 끊겼다.
절친과 연락이 끊겼다. 말 그대로 절친인데 표면적인 사건 없이 연락이 끊겼다. 더 황망한 것은 친구와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직면하고 나니 하루 전만 해도 사실이 아니었던 일이 하루만의 분기점으로 이제, 그녀와 나의 세계는 서로 간의 불가침 영역이 되어 버렸다. 우리 사이에는 국경처럼 준엄한 통관을 요구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다.
우리에게 이런 단절이 침습하기 전에 당연히 내가 먼저 연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사이의 연락이 느슨해지다 못해 드물어지고 완고한 침묵으로 단절을 선언하기까지 가장 명확한 사실은 내가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 연락이 단절된 것은 내가 고3 담임을 2년째 맡은 동시에 그녀의 아들이 고3이 되었던 작년부터이다. 작년 중순까지 그녀 아들의 입시에 대한 정보들로 소통하며 전화가 오갔다. 어느날 나에게 입시 관련한 얘기를 물어오기에 나는 “경험 많은 샘들에게 정확히 알아봐서 알려줄까?”라고 물으니, 그건 또 아니라고 했다. 속 깊은 그녀였기에 나름의 생각이 있을 것으로 짐작했고, 이미 그녀의 정보력과 조카의 앞가림 하는 수준을 보니, 굳이 내가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정신없이 우리 반 아이들 상담과 연이은 면접 준비로 2학기를 바쁘게 보냈고, 수능 일이 다가와서 긴장 속에서 시험감독을 하고 속속 발표되는 입시 결과를 수합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의 어느날 내 뇌를 불길하게 스치고 지나간 생각은 ‘아차...... 조카의 수능 응원 전화를 못했구나......’였다. 나는 엄청난 죄책감과 불안함을 애써 누르며 내가 그 일을 잊고 지나갈 수 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찾아 나를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이유로 나를 설득했다.
“너는 늘 너의 아들 얘기를 늘어놓기에 바빴어. 내가 너의 행복한 결혼생활과 너의 자랑스러운 아이들, 너의 안정적인 일상을 찬탄해 주기를 바라는 듯이 말이야.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때부턴 너의 감정이나 친구 간의 티키타카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빈번하게도 넌 너의 용건이 끝나고 나면 바로 대화를 그쳤지. 작정한 듯, 치고빠지듯 말야. 너에게 나는 감정 쓰레기통이나 마찬가지였던 거야. 나는 그런 너를 꽤 많이 이해하고 성심으로 답했다고 생각해. 그래 내 마음은 여기까지야. 내가 너의 친구로 활용되는 것을 이제 그만할게.”라고 말이다.
작정하고 내뱉거나 떠올린 말은 아니었지만 내 의식의 수면 아래서는 이런 이유들에 스스로 설득되어 친구와의 냉전 아닌 냉전으로 인한 심리적 충격을 교묘히 피해 갈 수 있었고 어느덧 점점 바쁜 일상에 묻혀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어느날 불현듯, 우리가 서로 일 년 넘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시 내 의식으로 퍼뜩 떠올라 왔다. ‘나 또한,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기에 우리 사이의 단절에는 나의 책임이 적지 않으며 나는 그녀를 밀어냈다.’ 라는 작고 은밀한 깨달음이 뒤따르자,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리고 더 작고 더 은밀한 소리가 내 안에서 속삭였다. “넌 또 잘못했어. 넌 역시 모든 일을 망쳐. 넌 단단히 잘못된 존재야. 네가 하는 일은 늘 파탄이거든.”
나는 심호흡을 해야 할 만큼 마음이 동요되었다. 그녀와의 단절이 가져다 온 삼단 파도의 종착지는 관계의 끝에 대한 회한이나 아쉬움, 미안함이 아니었다. 내가 가닿은 곳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늘 잘못되고 마는, 남들과는 다르게 결국엔 크게 오작동으로 귀결되는 나의 ‘존재에 대한 수치심’이었다.
수치, 그것은 매우 매우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수치심은 행동에 대한 교정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데에 그 해악이 있다. 수치심은 자기가 자기를 버리는 방식으로 작동하기에 그 사람은 스스로를 유기에 대한 공포로써 징벌한다. 그런 자신에 대한 박해감으로 인해 그의 삶의 에너지를 소진하고, 삶에서의 크고 작은 선택의 문제들을 어렵게 만들며, 결국 이런 삶의 방식이 그의 존재를 더욱 수치스럽게 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만든다.
나는 수치심에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그것은 흠씬 두들겨 맞아 파열된 근육에서 새어 나오는 활액과 피가 섞여 입안에서 감도는 맛이거나, 수은이 혈액 속에 섞여 심장으로 퍼져드는 느낌에 가까울 것이다. 수치심을 형용할 일반적인 단어는 없으며, 수치심에 머물러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 또한 절대적으로 드물다.
감정만큼 인생에 있어 실제적인 것은 없다고 말한 이도 있을 만큼, 감정의 문제는 언제나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항상 문제의 핵심이고 사건의 발단이자 사건의 귀결이다. 그러나 감정, 특히 수치심을 마주하며 자신을 바로 본다는 것은 거듭 말하지만 매우 고통스럽다. 나는 수치심의 감정과 맞닿을 때면 늘 ‘죽는게 낫지’라고 악을 쓰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분열된 내 안의 모든 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은유적인 비유가 아닌 생생한 현실적 상황이다.
그나마 관찰자적인 시각으로 나의 생각과 감정을 살피는 일상의 훈습을 몇 년간이라도 해 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예전과 같은 패턴으로 파괴적으로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들로부터 철수하여 나를 더욱 분열시켰을 것이다. 행동은 감정의 결과이거나, 감정을 피하기 위한(혹은 감정의 고조를 위한) 동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늘 남는 것은 감정의 문제이다. 행동은 하나의 적응적 방식일 뿐이다.
나는 그녀에게 아직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나의 근원적 수치심과는 별개로 우리 사이에는 그녀와 나의 내면적 역동이 있다. 그 무의식적 역동이 서로를 투사하며 의식의 역동과 얽혀 인연을 일단락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행동을 통해 감정을 바꿀 수도 있다. 언제라도 조금 용기를 내어 친구와 술을 한잔 기울이며 속내를 털어놓고 웃으며 헤어진다면 어느새 따땃해진 마음에 안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국면이 펼쳐지던지 핵심은 ‘사건이 남긴, 혹은 사건의 배후는 무엇인가?’의 문제다. 그 물음은 사냥을 위해 잠영하는 악어가 먹이를 낚아채듯 나를 심연으로 끌어들이기를 원하고 있고, 나는 지금 그 요청에 응답하는 중이다. 심연의 거대한 침잠 아래에서 자신의 가장 무거운 에너지를 알아차리기를 바라는 그것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나다. 그러나 아직 밝혀진 적 없는 무성한 소문뿐인 나.
지금 내 손에는 수치심이 전해준 은밀한 전보(傳報)가 들려있다. “해답은 너야!” 나는 미지와 무지, 결국에는 영지(永智)일 천년한설의 동토로 나를 향해 떠나야겠다. 그곳에서 만난 나에게 그녀와 나의 30년 우정을 좌초하게 만든 동인(動因)을 상냥하고 묻고, 다정하게 들어야겠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