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소개팅_인연이 꼬아 엮는 매듭 세월이 풀어헤친 해우
2024.11.16.(토)
시린 공기가 곧 당도할 것을 예감하지만 아직은 화창한 기분 좋은 주말 아침, 친한 동생의 카톡이 도착해 있었다. “언니, 나 000 씨 오늘 만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내 지인이었던 두 사람의 월하빙인(月下氷人)을 자처하며 연결해 주었던 것인데, 이제 나름의 결실을 맺어 첫 번째 공식 데이트가 있을 모양이었다. 나는 그게 마치 나의 일인 양, 카톡을 읽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나 좋아 그래! 그리고 서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의미심장한 기대와 뜻 모를 두려움도 함께 넘실대겠지! 얼마만의 격동일 거야!” 속으로 상상하고 짐작하며 둘의 마음을 넘겨짚어 보자니, ‘이런 인연의 마주침이란 어떤 의미일까’에 대해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둘은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귀한 인연들이며, 때와 환경이 준비되어야 만날 수 있는 인연을 통한 해우(解憂) 거리들을 내게 가지고 온 사람들이기에, 진한 상호작용으로 내게 많은 것을 주었던 사람들이다.
대학동아리 선배 A는 나의 성인기에서 가장 순수한 시절 만난 사람이다. 그 선배에게 나는 공동체성이 강한 동아리 내에서의 귀여운 후배였다. 그렇기에 내리사랑의 대상인 동시에, 방어기제가 덜 여문 상태에서 나의 본연에 가까운 순수한 모습을 공유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B는 내가 이혼을 준비하면서 배우자 외도를 겪은 공통점 때문에 빠르게 공감대를 형성했었다. 인생의 지옥 같던 진창에서 함께 굴렀고, 피해의식과 싸우며 동지애와 전투애를 쌓았다, 그런 처절한 마음을 스스로 보듬는 것을 서로 지켜보며 진한 연민을 나누었던 대상이다.
A선배와는 지속적인 소통을 해 온 것은 아니었지만 동아리 학사모임으로 묶여 꾸준히 한 그룹의 인연 안에 있었고, B는 나의 지인이자, 친한 동생이자, 동지이자, 나를 비춰주는 나의 거울 같은 숙명의 인연이다.
이런 둘을 인연의 빨간 실로 엮을 생각은 그간 결코 해보지 못했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 가을 동아리 학사 모임을 계기로, A선배를 2년 만에 보게 되었고 선배가 누군가를 소개받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이었다. 후배인 내게 직접 청한 일이 아니었지만, 다른 선배에게 전해 들은 말로는 꽤나 간절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선배는 한참 전부터 이혼 같은 별거생활을 해 온 것을 알고 있었고, 이혼은 이 년 전쯤 했더랬는데 자녀의 대학 진학과 동시에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기도 하겠거니.....”라고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B는 우리 모임(배우자의 외도를 겪는 중에 가정회복을 바라는)에서 꽤 빨리 이혼을 진행한 케이스였는데,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이혼을 결정한 이유로, 회복의 긴 여정에서 힘든 시간을 지나오고 있었다. 우리 모임은 어려운 시기를 함께 지나온 만큼 오라버니, 동생처럼 형제애로 똘똘 뭉친 모임이 되어 있는데, B를 우리끼리 말할 때는
“**이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힘든 걸까? 이제쯤 좋아질 때도 되었는데.”라고 언급하기도 할 만큼 그녀의 지난 5년은 혹독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그녀의 개인적인 기질과 성장환경의 지난함으로 인해, 내면을 추스르는데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성장과 성숙의 기회로 삼는데 진실했던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이 둘을 연결하는 데에 이르기까지는 우선 그 중개를 자처한 나에게도, 주변을 돌아볼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갖기 위한 내적인 성장과 성숙의 시기가 있었어야 했었고, A선배가 불행한 결혼생활에도 불구하고 그 결혼을 껍데기라도 유지하며 인고의 유예를 거쳐야 했던 시간이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의 잔을 하나도 남김없이 마시고서야, 이 한 지점에서 만났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끝나지 않을 것 같던(굽이굽이마다 겪어 지내야 했던) 고난의 사건들을 내가 옆에서 목격했고, 그녀 또한 내가 이혼이라는 시발점에서 시작해, 나에 대한 내면 작업에 골몰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선배와 나는 대학 때부터 연애와 결혼의 전 과정을 미루어 알고 있어, 서로 간의 역사를 아는 몇 안 되는 지인 중 한 사람들이다.
이런 세 사람의 인생 사건이 얽히고 나름의 경로를 지나오며, 24년 11월의 어느 날 각자의 근심거리가 풀려나 새로운 관계에 기꺼이 접속할 수 있는 한 점에서 만나기까지 우리는 한 치의 앎도 없었다. 그러나 정확히 이 자리에 호출되었다.
‘그렇기에 인연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인연이란 무엇일까? 답하자면, ‘운명의 호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면 우리는 운명 앞에 어떠한 자유의지도 없이 그저 정해진 운명의 트랙을 따라 무력하게 수송되는 존재들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엄중한 운명의 부름 앞일지라도 우리는 주저하고 고민하고 두려워하며 언제든 이러한 호명을 무효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본 영화 <컨트롤러>와 지인 둘의 만남은 묘한 레이어로 내게 영감을 준다. 주인공은 뉴욕주 상원의원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데이비드 노리스(맷 데이먼 분)로 유력한 정치가이다. 그는 뜻하지 않은 정치적 공작으로 자신의 치부를 해명하는 데에 실패하여 선거에서 불리한 처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우연하게 무용수인 앨리스를 만나게 된다. 그 둘은 우연과 운명의 이끌림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노리스는 이때 ‘컨트롤러’라는 집단에 의해 조종자라는 이름으로 자처하는 이들 조직의 조작과 계획(운명)에 따라 ‘그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인간의 모든 삶의 모습은 조종자들의 계획에 의해서만 통제되어야 하는 '컨트롤러'의 세계관 속의 이면을 보게 된 것이다. 조종자들의 계획과 초인적인 통제력 속에서도 노리스는 결국 앨리스와 사랑을 성취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그 둘의 서로에 대한 헌신의 마음으로 조종자의 총수인 회장님의 또 하나의 노림수였던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실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것이다.
다시 돌아와 묻고 싶다! 그처럼 말 많고 탈 많은 연애라니 말이다. 중년의 마지막 길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짝을 그리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왜 이토록 이성인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연애가 아무리 남녀 간의 장난 같은 것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게다가 출발한 곳은 각기 달라도 종착지는 한 곳에서 내려야 하는 닫힌 결말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태생적 한계와 인간 삶의 누추함을 초월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확률의 희망일지라도 그것이 있음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영화 <컨트롤러>에서 처럼 말이다.
선배는 동생과의 첫 번째 통화 이후,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선배는 남자라는 생물학적 종의 특성에 걸맞게 마음에 드는 이성을 발견하자마자, 이제는 생애 최초의 직진 작전으로 공략하겠다고 나에게 선포 아닌 선언과 깊은 감사를 동시에 표해왔다.
곁들여 여자의 심리에 따른 앞으로의 관계 형성에 대한 조언을 곁들여 격려하자, 전국 최상급 밤을 수매할 수 있는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특급 알밤을 평생 제공하겠다고 사례를 했다.
동생 역시 약속이나 한 듯 연이어 내게 전화를 해왔다. 선배의 직진이 내심 놀라운 즐거움이면서도 두렵다는 것이었다. 둘 다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한 충성으로 인해 연애세포의 손상이 심각한 연애고자로 초기화된 상태였다. 중년에 이른 경험과 피드백으로 삶의 지혜 보따리를 풀어내기는커녕 바들바들 떨면서 마냥 설레는 소년소녀로 그 둘은 출발하고 있는 듯했다.
한데 아무렴 어떤가? 나는 그 둘에게 공통으로 이 연애가 종착지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며, 연습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공언했다. 나의 눈치를 보지 말고 어른이의 연애를 해보라고도 격려하기도 했다. 그 둘은 각자의 서투름을 인정하고, 초반의 입장 차와 작은 오해들을 조정하여 이제 나란히 커플로 운명의 부름 앞에 인연이 되었음을 내게 전해왔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의 의지로써 함께 조율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이 어떤 인연을 펼쳐갈지에 대해서는 이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나의 역할은 몇 개의 디딤돌 역할이었을 뿐이니 말이다. 그들의 연인으로서의 새로운 인연을 연결 짓는 이런 나의 쓸모는 참으로 즐겁고 기껍다. 나의 것이 아님에도 그들에 대한 소정의 기여 지분이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런 일이 사람 사는 진 맛이며, 삶의 재미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돌아가서 다시 말하기를, 인연은 무엇인가? 아니,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에 대한 나의 결론 하나를 작게 일별 할 수 있겠다. 인연은 각자의 자리에서 그 시기에 주어진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낼 때, 그 삶의 과제에 대한 해우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가장 적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찾아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 내가 나의 일에 조금 더 몰입했을 때, 나의 다음 인연이 찾아오는 시기는 그만큼 더 앞당겨진다. 그렇기에 인연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순전히 에너지적인 관점의 해석일 수밖에는 없다.
새로운 인연을 바라는가? 그것이 사람이든 일이든 사건이든 그것을 당겨오는 법은 오늘의 하루를 잘 사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에 들어야 할 에너지를 아끼지 말고 필요한 만큼의 생명력과 집중을 모두 투여하길 바란다. 내 앞의 쓴잔을 모두 마시기를 기꺼워하자는 것이다. 사람이든 사건이든 환경이든 그 무엇도 인연이라고 해석한다면, 어떤 위치와 상황에서도 나름의 피드백과 함께 악전고투하던 인연은 마무리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매듭을 위한 스텝으로 우리의 위치값은 변형되어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 얼개를 만들어 내게 펼쳐진다.
그러므로 인연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인 ‘성장을 위해 주어진 환경이자 미션’이다. 그렇기에 또한 모든 인연은 ‘시절인연’이다. 인연은 한 사람이 가져오는 열린 결말의 가능성이다. 거듭 강조하자면 “내 삶을 풍요롭게 하고 확장할 인연을 찾는 방법은? 그 자리에서 충실할 것!”이다. 지금의 사건들에서 최대한의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배움이 끝나면,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다른 인연들로 채워진다.
누구나 익히 알고 있어서 너무 당연하고 평범한 진리! 그것이 역시 진리며 진실이다!
진실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