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나의 욕망인가 타인의 욕망인가. 문득 헷갈린다. 분명 내 의지로 결제 버튼을 눌렀을 뿐인데 뭔가 개운치가 않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샌가 무얼 샀는지도 잊어버린다.
스마트폰에 엄지를 올리는 순간부터 유혹은 시작된다. 인스타 속 유명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다 보면 그가 공구한다는 물건을 어느샌가 결제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유튜브 속 유명인이 매일 먹는다는 영양제가 좋아 보인다. 나도 먹으면 건강해질 것만 같다. 검색창에 찾아 어느샌가 가격을 비교하고 있다. 여행 유튜버가 추천하는 인생 맛집으로 달려가 식당 앞 긴 줄에 동참해 본다.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인생 여행지에서 찾아간 식당의 음식은 내가 원했던 맛이었나 싶을 때도 많다.
어느 하나도 광고 아닌 것이 없다. 존 버거는 ‘광고의 목적은 현실에 최대한의 불만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 만들어낸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세상에 살고 있다. 누군가 만들어낸 욕망이기에 또 다른 욕망을 만나면 곧 새로운 결핍에 빠진다.
진짜 내가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나. 정말 내가 사고 싶은 건 뭐였더라. 내가 갔던 여행지가 정말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이었던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나의 꿈인가 남들이 좋아 보인다고 하는 것인가.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진정 내가 바라던 바인가.
이런 생각들을 할 겨를조차 빼앗기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했던 자크 라캉의 말을 떠올려 본다. 어쩌면 지금 시대는 욕망을 ‘처리’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져 새로운 결핍을 찾아 끊임없이 엄지를 분주히 움직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진석은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에서 불변하는 두 가지를 상기시켜 준다.
1. 이 세계는 항상 변화한다.
2. 우리는 금방 죽는다.
45억 년 된 지구에서 인간의 수명을 계산해 보면 0.002초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짧디 짧은 찰나의 인생에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도 모른 채 살다 죽는다면 얼마나 서글플까. 타인의 욕망에 휩쓸려 스스로 생각하는 힘마저 잃어버린 채 자본에 종속된 삶을 살다 간다면.
문득 나에게 물어본다.
“오늘 너로 살고 있니? 너로 존재하고 있니?”
타인의 욕망을 여과 없이 수용한 내가 아니라 진짜 내 모습으로 오늘 지금 잠시라도 존재하고 싶다. 잠깐이지만 고요한 눈으로 나를 들여다본다.
헤르만 헤세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향해 걷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고 했다. 내 속에 잠들어 있는 나만의 것이 무엇이었던가. 가만히 찾고 또 찾으면 무언가 솟아 나오려는 것이 있을 터이다. 바로 그것을 발견하고 살아내는 삶이 나로서 존재하는 길일 텐데 어렵기만 하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열대 우림 속에 던져진 선인장처럼 도파민 가득한 외부의 온갖 축축한 자극을 흡수하고 살 수밖에 없다. 눈 뜨고 잠들기 전까지 만나는 모든 것이 이것이 너의 욕망이라고 세뇌한다. 세뇌당한 욕망인 줄도 모르고 실현하려 애쓰며 살아간다.
나로서 살기에도 짧은 삶이다. 이 글을 쓰고 나면 다시 엄지의 유혹은 시작되겠지만 그래도 나로 살고 싶다는 소망의 렌즈 하나를 덧씌우고 보고 싶다. 넘쳐나는 자본의 욕망 너머에 있을 내 안의 가치와 의지를 기억해보려고 한다. 하루 중 잠깐의 틈이지만 고요한 시간을 나에게 허하려고 한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물어봐야겠다.
“오늘 하루 너로 살았어? 너로 존재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