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당신을 알기 전엔 시 없이도 잘 살았습니다>
밴쿠버에서 아침에 출발한 버스는 하루를 꼬박 달리고 있다.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 가고 점심 먹으러 한 시간 정도 내린 중식당 빼고는 계속 버스 안이다. 창밖으로 빽빽한 침엽수림이 스쳐 지나고 드넓은 평야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간간이 작은 마을도 눈에 담으며 달리고 있다. 56인석이 거의 만석이다. 맨 뒤에서 두 번째 창가 자리가 내 자리다. 옆자리에 앉은 처음 만난 동행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대한 창 쪽으로 붙어 기대어 앉다 보니 자리가 더 비좁게 느껴진다. 로키산맥 국립공원과 빙하 호수를 둘러보는 단체 여행 중인데 밴쿠버에서 출발하였기에 3박 4일의 중 첫날과 마지막 날, 이틀은 종일 이동하는 일정이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줄 책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당신을 알기 전엔 시 없이도 잘 살았습니다> 공항 서점에서 책 제목을 보자마자 홀린 듯 사서 나왔다. 류시화 시인의 시집이다. 누군가의 시를 엮은 책이 아닌 시인 자신의 시를 모은 시집이라 더욱 반가웠다.
사춘기 시절에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읽으며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불완전한 존재 둘이 만나하는 온전한 사랑을 어렴풋이 동경했다. 대학 시절에는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읽고 인도 여행을 꿈꾸었다. 결국 내 키의 절반 정도 되는 길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한 달간 인도 여행을 떠났다. 시인의 눈에 비친 인도와 내가 겪은 인도의 실상은 아주 달랐지만, 여정의 중심은 류시화의 여행기였다. 그 후로 처음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읽은 책도 류시화 시인의 책들이었다. 시집과 수필집 등 그가 엮은 책들에 자연스레 손이 먼저 갔고, 그의 글을 읽고 나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지고 가슴에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에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로키산맥을 향해 끝없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또다시 그의 시를 읽고 있다. 더욱 깊어진 그의 시 한 편 한 편을 읽고 음미하느라 책장이 쉬이 넘어가질 않았다. 책장을 열고 그의 시 세계로 들어가니 어느새 창밖의 풍경도 비좁은 자리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그와 나 두 사람의 교감만이 있는 세상이었다.
<사랑한다는 것> 중 일부분
별의 흔적이 묻은 영혼이
같은 별의 흔적이 묻은 영혼에게 이끌리는 것
너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
너를 알아가면서 나를 알아가는 것
너에게 다가가면서 세상에 다가가는 것
두 사람이 사랑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두 사람을 찾아오는 것
너를 향해 다가감이 세상에 다가가는 것.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 다가갈수록 세상의 본질에 좀 더 가까워지는 느낌을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너를 사랑하는 일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도 같다는 사실을.
“이번엔 어디로 가?”
“캐나다에 가려고, 호수 보러.”
명료했다. 수년 전부터 로키에 있다는 루이스 호수를 보고 싶었다. 이유는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 연주곡 때문이었다. 지금은 찾아볼 수도 없는 카세트테이프로 유키 구라모토의 연주 앨범을 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딴 딴 따 단’하는 선율이 머릿속에 각인될 정도였다. 그 선율 속의 레이크 루이스를 보러 캐나다에 왔다. 류시화의 수필집이 나를 인도로 데려갔듯 유키 구라모토의 선율이 나를 캐나다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레이크 루이스를 만나러 길에, 나는 또 이렇게 류시화 책을 읽고 있다. 만난 적도 없는 두 사람이지만 시와 선율로 내 삶의 여정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하루를 꼬박 달려 로키산맥에 있는 국립공원에 다다랐다. 그리고 다음 이틀 동안 5대 호수로 불리는 유명한 호수들을 방문하게 되었다. 로키의 호수가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에메랄드빛의 물빛 때문이다. 빙하가 녹은 물이 석회질이 함유된 암석을 타고 흘러내리며 호수가 만들어지는데 이 물이 햇빛을 받으면 에메랄드색을 내게 된다고 한다.
보우, 페이토, 모레인 호수를 보고 난 후 밴프 국립공원에 있는 레이크 루이스에 도착했다. 이미 아름다운 물빛의 호수를 세 개나 보고 온 터라 물빛의 감흥은 덜할 거라는 생각과 그래도 레이크 루이스만의 무언가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동시에 들었다. 주차장에서 호수까지 짧은 숲길을 걸어가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 시간 버킷리스트에 있던 곳을 보기 직전의 기분 좋은 설렘이었다.
짧은 숲길이 끝나고 갑작스레 거대한 호수가 나타났다. 빅토리아산에 쌓인 눈과 얼음이 엄청난 무게에 못 이겨 내려오며 만들어진 루이스 호수는 길이 2.4km, 폭이 0.3km로 규모가 제법 크다. 호숫가는 설레는 얼굴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호숫가 앞 돌멩이에 앉아 호수 위 반짝이는 아름다운 윤슬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윤슬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하는 무언가가 올라왔다. 아이팟을 귀에 꽂고 유키 구라모토의 레이크 루이스를 듣고 또 들었다. 호수의 풍경과 선율이 나를 통해 만나는 순간이었다.
호수 뒤편으로는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지은 빅토리아산이 자리 잡고 있는데 마치 루이스 호수를 두 팔 벌려 안아주고 있는 듯했다. 루이스라는 호수 이름도 빅토리아 여왕의 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어머니가 딸을 안아주고 있는 따스하고 고요한 풍경을 보며 들으니 피아노 선율이 더욱 포근하게 들렸다.
레이크 루이스의 피아노 선율이 나를 캐나다 루이스 호수로 데리고 왔다. 여행 중에 읽은 류시화의 시와 보았던 풍경과 만났던 사람들과의 교감이 또 어떤 미지의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갈까. 내가 읽은 책과 들었던 음악, 만났던 풍경과 사람들이 나의 다음 여정을 결정한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내가 쓰는 글이 한 사람의 마음에라도 가서 닿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꿈꾸었다. 내가 좋은 글을 읽고 마음의 위안을 받고, 삶의 방향을 정하고 나아갈 힘을 얻었듯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비록 만나지 못하더라도 글을 통해 서로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어떤 만남보다도 소중한 만남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