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햄릿>
에코백에 노트와 볼펜을 넣고 집을 나섰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도서관에서 좋은 책 몇 권을 읽고 오리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설레었다. 한강 작가의 <빛과 실>이 좋았는데 오늘은 다른 저서들을 읽어볼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을 읽어볼까. 도서관까지 걸어가는 동안 서가의 책들을 떠올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도서관 입구가 가까워지는데 왠지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현관 앞까지 가보니 ‘도서관 휴관’ 팻말이 보였다. 갑자기 허탈감이 밀려왔다. 오늘 나의 하루 계획이 틀어지는구나. 어제 휴관 일이 언제인지 확인했어야 했다. 집에서 나오기 전이라도 한 번쯤 생각했어야 했다. 머쓱해진 발걸음으로 동네 한 바퀴를 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2년 만에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가을에 떠나는 제주는 오랜만이라 더욱 기대되었다.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바닷가와 한라산 자락을 걸을 생각으로 기분이 좋았다. 연초에 비행기표와 호텔을 예약하고 일정을 짰다. 4박 5일 동안 최대한 알차게 보내기 위해 추천 여행지들을 찾아보며 여행 계획을 세웠다. 가장 기대되는 것이 바다 요트였다. 요트를 타고 바다 위에서 보는 일몰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네이버에서 요트 상품을 찾아 예약했다. 선상 일몰이라니 생각만 해도 낭만이 느껴졌다. 하지만 출발일이 다가오며 날씨 예보에 비와 바람이 계속되었다. 결국 요트를 취소했다.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연극에서처럼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짠’하고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어려운 국면을 타개하게 만들어주는 극적인 존재 혹은 장치를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바로 이 장치가 등장한다.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만난 해적들 때문에 햄릿은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살해될 운명이었던 햄릿은 오히려 해적들의 포로가 되어 덴마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덴마크의 왕자인 햄릿은 아버지가 숙부에게 독살당했음을 알고 복수를 결심한다. 하지만 미친 척 연기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연인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 충격으로 오필리아마저 죽는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인 레어티스와 결투하는 과정에서 햄릿의 어머니가 죽고 레어티스와 햄릿도 결국 죽음에 이른다. 비극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왕자였던 햄릿은 복수를 계획한 후 되는 일이 하나 없었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의 말처럼 ‘하나’ 하고 끝난 아니 하나도 제대로 못 이룬 인생이었다. 뜻한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인데, 왜 우리는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고 있을까.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목표 설정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 인간은 원시 시절부터 살아남기 위해 음식을 구하고 거처를 마련하는 등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 행동했다. 이러한 목표 지향성이 생존 확률을 높였고 우리 뇌에 깊이 각인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목표는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삶의 방향성을 정해준다. 꿈과 목표가 있을 때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도전하며 산다. 목표를 달성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다시금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성장하고 주도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계획한 대로 모두 이룰 수는 없다. 통제 불가능한 변수를 만나 실패하거나 예상 밖의 결과를 얻기도 한다. 오늘 하루 계획이 뜻하지 않은 이유로 틀어지거나 모처럼의 여행에서 날씨 악화로 일정을 변경하기도 한다. 건강상의 이유로 목표했던 바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고 함께 하고 싶던 사람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나가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 삶에서 의지와 불확실성의 영역은 항상 공존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뇌에 깊이 각인된 생존 본능으로 목표 지향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 자체가 삶이다. 실패이든 성공이든 나에게 닥치는 사건들을 수용하며 다시 시작하고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햄릿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인생의 허무를 느끼기보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분투했던 한 사람의 삶의 과정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마음을 쏟되 결과에는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성숙함을 배우고자 한다. 비록 안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다져보려고 한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 결과는 우리 것이 아니요.
인간인 우리는 목표물을 대충 깎고 그 완성은 신이 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