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셰퍼 <내게 남은 스물다섯 번의 계절>
내게는 몇 번의 계절이 남았을까.
내 나이부터 한 살씩 더해 숫자들을 나열해 본다. 100세 시대라고 하니 욕심내어 100까지 써보자. 나열한 숫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 나이 무렵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내 몸은 시간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품어낼 터인데 그땐 어떤 마음일까. 매년 살아낸 나이를 하나씩 지워나간다면, 그래서 손꼽을 정도의 숫자들만 눈앞에 남은 날이 온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독일 작가 슈테판 셰퍼가 지은 <내게 남은 스물다섯 번의 계절>을 읽고 내게는 몇 번의 계절이 남았을까 하는 궁금함이 먼저 들었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고 하지만 남은 시간을 헤아려본다는 건 삶에 대한 나름의 희망과 의지의 표현이라 여기고 싶다.
머릿속에는 할 일이 끊임없이 떠오르고, 핸드폰 알림이 쉬지 않고 울려대는 바쁜 일상을 보내던 ‘나’는 주말을 보내기 위해 홀로 별장에 간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이웃 ‘카를’을 만난다.
“아이고, 그쪽도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나 봐요? 주말에 이렇게 일찍 일어나시다니.” 그가 말을 걸었다.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뇨, 인생에서 굴러 떨어졌어요.”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둘은 오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나는 중학교 이후 처음으로 호수에서 수영을 한다. 심호흡한 뒤 물풀을 잡고 호수로 미끄러져 들어가 팔을 뻗어 물을 가를 때마다 그동안 짓누르는 부담에서 벗어나 단순해지는 느낌, 오랜만에 나를 위해 한 가장 자유로운 일이었다.
수영한 후에는 카를의 집으로 가서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눈다. 건강과 칼로리를 생각한 식단에 익숙했던 나에게 풍성하고 달콤한 그와의 식사 시간은 충격적일 만큼 신선했다. 또한 그와 보낸 주말은 나머지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줄 만큼 완벽하게 행복한 하루였다.
완벽한 하루. 오늘처럼 지내다 간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은 하루는 어떤 하루일까.
일단 하루를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시작했으면 한다. 걱정과 스트레스 없이 눈을 뜨고 평온하고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충분하고 질 좋은 수면이 보장되어야 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하겠다. 기상 후엔 신선한 재료로 만든 영양이 풍부한 아침 식사를 하고 가벼운 산책 등의 운동도 하면 좋겠다.
그리고 적당한 강도의 의미 있는 일에 몰입하며 깨어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생존을 위한 돈벌이를 넘어 보람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이었으면 한다. 현직에서 은퇴하는 날이 오더라도 가치 있는 일을 찾아 지속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책에서는 무언가를 선택할 때 기준으로 삼을 만한 네 가지 질문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것이 당신에게 사랑과 평화를 주는가?
그것이 당신에게 기쁨과 힘을 주는가?
그것이 당신에게 자유와 자율을 주는가?
그것이 당신에게 휴식과 안정을 주는가?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 사랑과 평화, 기쁨과 힘, 자유와 자율, 휴식과 안정을 주는 일이었으면 한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사람들에게도 그랬으면 한다.
하루 중 가까운 사람들과 교감하는 시간은 꼭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동료들과 협업하는 등 소중한 사람들과 연결되는 시간은 좋은 하루를 보내기 위한 필수 조건인 것 같다. 사랑하는 이들과 맛있는 식사를 하고 차 한잔 나누는 시간이야말로 행복한 시간이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 못지않게 하루 중 나와 만나는 시간도 갖고 싶다. 운동이나 취미 활동도 좋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도 좋다.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건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30분이 될지라도 이런 충전의 시간을 갖는다면 나를 돌보고 성장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평온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 오늘 하루 잘 보냈음에 감사하고 다가올 내일을 기대하며 잠들 수 있다면 더없는 밤이 될듯하다.
적어보니 나에게 완벽한 하루란 참으로 간결하다. 그리고 현재 내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새삼 놀랍기도 하다. 후회 없을 정도로 행복한 하루가 무언가 거창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적어보니 별다른 게 없다. 그동안은 지금의 삶이 부족하고 뭔가를 더 채워 넣어야만 완벽해질 것만 같았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의 삶을 부러워하며 스스로 결핍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주인공이 카를을 만나 함께 보낸 주말 동안 더없는 행복감을 느꼈듯 나에게 진짜 충만함을 주는 것들은 모두 나의 소박한 하루에 담겨 있는 듯하다.
무엇이 이토록 단순한 삶의 진리를 잊게 하는가. 급변하는 시대에 끊임없이 디지털 세상에 접속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일까.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일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일지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의 중심을 잡아가고 싶다.
정작 카를에게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사실 자신이 시한부임을 알고 있는 카를과 나는 별 차이가 없다.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