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뒤늦은 깨달음의 형태로 온다

<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by Little Prince

* 태양이 비추고 있는 동안 건초를 만들어라.

* 기회가 두 번 그대의 문을 두드린다고 생각하지 마라.

* 지난 일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의 일도 생각하지 마라. 다만 현재를 보라.


손바닥보다 작은 낡은 수첩을 펼치니 낯익은 엄마의 글씨로 쓴 메모가 보였다. 명언, 요리법, 여행지에서의 짧은 메모, 이름과 전화번호 등으로 수첩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엄마가 종종 메모하던 모습은 본 적이 있지만 메모 내용을 읽어본 일은 처음이었다. 수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날짜와 함께 적힌 메모들을 읽자니 엄마의 일기장을 몰래 보는 듯한 묘한 쾌감이 들었다.


편의점 한구석 플라스틱 바 테이블 앞에 앉아 집에서 급하게 챙겨 나온 엄마의 물건들을 살피는 중이다. 협탁 서랍에서 발견한 몇 권의 다이어리, 수첩, 우편물 등 기록으로 보관하거나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 물건들을 몇 가지 챙겨 나왔다. 처음 마음은 ‘돈’이었다. 무언가 돈이 되는 게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금붙이라도 나오면 좋겠다는 탐욕이었다. 하지만 금전이 될만한 건 나오지 않고 엄마의 기록들만 손에 잡혔고 예상보다 업체에서 일찍 도착하여 서둘러 집을 나와야만 했다.


엄마가 떠나간 집이 곧 재건축에 들어가서 아파트를 공실로 만들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가 쓰시던 가구와 집기류들이 그대로 남아 있던 터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싶었는데 검색 몇 번으로 전문 업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집 안의 물건들을 폐기 처리해 주는 업체로 집에서 짐을 꾸려 챙기는 건 이사 업체와 같으나 새집으로 가느냐, 폐기물 처리장으로 가느냐의 차이였다. 다행히 집 근처에 전문 업체가 있어 수월하게 예약해서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편의점에서 업체가 집을 비우기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의 다이어리와 수첩, 우편물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우리 가족의 역사가 담긴 집이 비워지고 있는 동안 엄마의 역사가 담긴 수첩을 보고 있자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경한 감정이 올라왔다. 수십 년 세월이 담긴 가구며 살림살이들이 버려질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짤막한 메모에 남은 엄마의 그 집에서의 삶을 들여 보고 있었다.


김애란의 소설 <레몬 케이크>에서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동네 책방을 하는 기진과 건강검진을 위해 상경한 엄마의 이야기가 나온다. 기진은 우연히 ‘인생은 즐거운 것이 아니다’라는 문항과 ‘살아 있는 것이 참 기쁘다’라는 문장이 양립하는 엄마의 문진표를 보게 된다. 매일 술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기진은 맨 정신으로 삶을 견디는 엄마가 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고 엄마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엄마의 지나온 삶을 읽으며 그동안 몰랐던 엄마의 마음속 세상을 조금 알게 된 기분이다. 엄마가 수첩을 본다면 뭐라고 하실까. 옛 추억에 잠기며 그땐 그랬지 하시려나. 어쩌면 내가 언제 그런 메모를 했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른다.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이제는 최근 기억을 거의 잊어가는 엄마를 만나면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많이 묻게 된다. 그래서 오늘 발견한 엄마의 최근 수년간의 기록이 더 반갑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메모처럼 지난 일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의 일도 걱정하지 않으련다. 다만 이제는 엄마를 만나면 현재의 이야기에만 집중하려 한다. 함께 보고 먹고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만 하려 한다.


재건축으로 얼마의 금전적인 이득이 있을까, 수치를 먼저 계산해 왔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경제적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들을 읽고 있자니 인식조차 못 하고 지내온 내 모습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었다. 한 가족의 일대기가 담겨 있는 집이 가진 역사나 가치보다 재개발로 인한 경제적 이득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당연해진 뼛속까지 자본주의에 적응한 나를 한 번이라도 낯선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그 무엇은 반드시 있는 것이라고 한 번 더 상기해 본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뒤늦은 깨달음의 형태로 다가온다. 집이 허물어질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보다 가족들이 먼저 떠나갈 것이라는 사실과 서로의 추억을 나누며 대화할 수 있는 때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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