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1. 사랑의 시작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가능했던 수많은 삶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가 사랑했던 것도 다르게 살았을지도(다른 누군가와 사랑했을지도) 모를 가능성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영혼까지도 읽어주는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는 다른 선택지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곳은 화장실 앞이었다. 한 손에 칫솔을 들고 막 양치를 마치고 나오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잠깐이었지만 시간이 멈춘 듯했다. 보이지 않게 유영하던 공기의 흐름마저 멈칫한 찰나였다. 잠시 후 시간과 공기는 다시 흐르고 우리는 스쳐 지났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서로의 눈 속에 오래 머무는 사이가 되었다.
2. 대상의 신격화
나는 그의 모습에서 오랫동안 막연하게 찾아다녔던 바로 그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그동안 나도 몰랐던 내가 바라왔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따스한 눈빛은 내 표정과 행동이 무엇을 느끼고 하고 싶어 하는 지를 귀신처럼 읽어냈다. 우리는 마주 보고만 있어도 서로의 에너지를 채워주는 인간 충전기가 되었다. 손을 잡거나 포옹하면 마치 원래 한 몸이었던 것 같은 완전함이 느껴져 몸이 떨어질 때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잠깐의 고통마저 일었다.
어쩌면 우리가 완전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를 보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내 앞에서 내 말을 들어주기 전까지 우리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내가 온전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는 순간은 나를 잘 알아주는 사람, 때로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이다.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볼 때 나의 모습을 알 수 있듯 나를 오롯이 비춰주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만이 비로소 내 존재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 나조차 못 보는 나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
3. 역경과 극복
사랑 앞에 역경이 버티고 있을 때 사랑은 극대화되곤 한다. 뛰어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높고 높은 장벽이 있을 때 사랑의 힘으로 그것을 넘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둘 사이에 놓인 물리적 거리, 사회적 지위, 경제적 차이, 국적,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아주 작은 균열, 문득 찾아온 미세한 감정의 균열이었다.
4. 평화 vs 권태기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는 것이, 항상 모든 요구가 충족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갈망하는 대상은 끊임없이 나타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안정적인 사이는 없다. 꽃처럼 피고 지는 마음의 순리를 거스르기 위해서는 바로 이 단계가 중요하다. 성숙한 사랑으로 한 단계 올라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승화 과정이 필요하다. 호르몬의 영향을 받지 않는 때가 오더라도 서로의 호르몬이 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많은 연인이 극복하지 못하는 난관이 바로 이 지점이다. 활활 타오르던 마음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고 은은하게 빛을 내도록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 힘이 존재하기는 한 걸까.
5. 이별
은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모든 사랑의 불꽃은 꺼지고 만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얼룩덜룩했다. 사랑의 감정이 사그라듦과 동시에 지불해야 할 쌓인 세금 고지서 같은 현실만이 피부에 남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도 계절의 변화처럼 순환한다. 몽글거리며 벚꽃이 피어나던 자리에 꽃잎은 떨어지고 초록 잎이 돋아난다. 무성한 푸른 잎이 붉은 태양을 묵직하게 머금다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낙하하듯 사랑이란 감정의 강도와 성격에도 순환 패턴이 생긴다. 패턴을 따라 돌고 돌다 꽃봉오리를 다시금 만들지 못하면 영원히 지고 만다. 그리고 완전히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았던 사랑 이야기로 기억될 뿐이다.
6. 슬픔의 내재적 일상화
한때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 삶을 의미 있게 해 준 사람이었다. 이보다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감정이 무언지 느끼게 해 준 그였지만 행복은 우리 삶처럼 영원하지 않았다. 함께 갔던 장소는 다른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 속에 추억이란 이름으로 묻히고, 함께 보낸 시간은 페이지를 넘겨버린 일기장 속 몇 줄의 기록으로 남아 나의 역사가 된다. 그와 보낸 시간의 주름은 폭이 좁아지다 어느샌가 사라져 희미한 흔적만 남는다.
7. 또 다른 만남
희미한 사랑의 흔적은 몸에 기록된다.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길에, 그윽하게 바라보던 눈동자에, 사랑을 말하던 입술에, 따스하게 포옹하던 두 팔에 새겨져 있지만 누군가 알아봐 줄 때만이 비로소 기억해 낼 수 있다.
온전하게 존재하기 위해서 사랑의 세포는 기억하고 포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