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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새 Jan 20. 2023

아이가 사라졌다(2)

내 욕심에,

괴롭다는 아이에게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했다.

그 말을 하고 바로 다음날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핸드폰 진동소리가 울렸다.

그 날따라 진동소리가 유독 요란했다.

액정에 ‘학원선생님’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전화를 받았다.

다급한 목소리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어머니! ㅇㅇ이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않아요.

저와 친구들이 교문 앞에서 기다렸는데 보이지 않아요. 혹시 ㅇㅇ이가 몇반인가요? 아직 교실에 있는지 제가 가서 보겠습니다.“

반을 알려드리고 아이에게 전화를 했지만

핸드폰이 꺼져있었다.

위치추적때문에 핸드폰을 사줬는데

핸드폰이 꺼지니 그 기능도 무용지물이었다.

그 사이에 학원선생님이 교실에 도착했지만

아이는 이미 하교했다고 했다.

학원 선생님과 학교 담임선생님,

나까지 그때부터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두 선생님은 학교 주변 CCTV를 살펴보겠다고

하셨고, 나는 집에 계시는 친정엄마에게 연락했다.

“엄마, 지금 ㅇㅇ이가 없어졌어. 아무데도 없어.

혹시 모르니깐 엄마는 집에 있어봐. 나는 지금 곧장 회사에 말하고 퇴근할게.”

아마 이것보다 더 두서 없이 말했던 것 같다.

남편에게도 전화해서 상황을 알렸다.

통화를 끝낸 후,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방금 달리기 결승점에 도착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자꾸만 턱끝이 떨렸다.

덩달아 집에 일이 생겨서 급하게 퇴근하겠다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중간중간 혀도 씹은 것 같다.

조퇴 결재를 올리는 손가락 끝도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결재를 상신하고 급하게 나와서

운전대를 잡았다.

손끝, 발끝이 저려와서 시동을 걸어놓고도

한참을 출발하지 못했다.  

이대로 운전을 했다가는 사고가 날 것이 자명했다.

억지로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의식적으로 천천히 달리자고 되뇌이며 출발했다.



출퇴근길은 해안가의 꼬불꼬불한 길이다.

특별히 더 심호흡하며 천천히 달리자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달리고 있었다.

고불거리는 길이 마치 내 머릿속 같았다.

입으로는 침착하자, 천천히 달리자를 외지만

머릿속은 이리저리 생각이 엉켜 질서를 잃었다.

그렇게 10분즈음 지났을까.

친정엄마의 전화가 왔다.

“응, 엄마. 나 지금 가고 있어.”

“ㅇㅇ이 찾았다! 지금 집에 와있어.”

“어?!진짜??!!!어떻게? 어디서 찾았어?!”

“애가 혼자 걸어서 울면서 집에 왔더라. 현관문에 서서 얼굴보자마자 하는 말이 학원가기 싫다는 말이더라. 야. 그깟 돈이 아까우면 뭐 얼마나 아깝다고 이렇게 싫다는데도 애를 몰아세우냐! 내가 앞으로 그 학원 안가도 된다고 했다. 엄마가 가라고 하면 할머니가 엄마 혼내줄거니깐 엄마 말 듣지말고 학원 안가도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알고 있어라. 선생님들한테도 연락드리고. 너도 조심히 운전해서와. 사고 날라.“



속사포 같은 말을 끝으로 핸드폰도 조용해졌다.

갓길로 핸들을 돌려 차를 정차시켰다.

일단 선생님들과 남편에게 아이를 찾았다고

연락을 돌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멍하니 윤슬로 반짝이는 바다가 보였다.

눈이 부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눈이 시려웠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내가 너를 몰아 세웠구나.

계속 힘들다는 너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구나.

네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구나.

엄마가 정말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해.







한참을 울고 마음을 추스린 뒤에 집에 갔다.

아이는 내 눈치를 봤다.

마음대로 학원을 안가서 엄마가 실망했을까봐.

그 모습을 보니 추스린 감정이 다시 올라오려

했으나 이내 꾹 참고 아이를 안아주었다.

“너무 고생했어. 힘들었지? 엄마가 우리 ㅇㅇ이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해.”

품에 안겨 훌쩍이는 아이를 한참 도닥여줬다.



나중에 물어봤다.

교문 앞에 선생님과 친구들이 기다렸다는데

어떻게 왔는지, 아이 걸음으로 15분은 걸리는 거리인데 어떻게 집으로  찾아왔는지.

등교는 스쿨버스로, 하교는 학원차로 하던 아이라

혼자 걸어왔다는게 신기했다.

더군다나 등하교 길에는 왕복 8차선을 가로지르는

횡단보도 1개와 경로에 따라서 짧은 횡단보도도 여러개 건너야했다.

제 몸보다 큰 책가방을 메고 어떻게 짧지 않은

그 거리를 왔을까.

아이는 대답했다.

학원 선생님과 친구들이 보여서 나무 뒤로

몸을 숨겨서 교문을 빠져나왔고, 혹시 학원차가

달려가다가 자기를 발견할까봐 정신없이 뛰어왔다고 말이다.

3월 초에 친정엄마가 하교하면 교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셨다.

그렇게 한 달을 하고 4월부터는 학원차로 하교했다.

3월 한달동안 집으로 가는 길을

아이가 외웠던 모양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더 가슴이 아팠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몸을 나무 뒤로 숨겨

빠져나와 혼자 가본적도 없는 길을 달렸을까.

무서웠을텐데...

너의 그 괴로움이 그 무서움보다 더 컸구나.

너는 그만큼이나 필사적이었구나.

이제 막 가족에게서 친구에게로 확장되기

시작한 너의 작은 세계인데,

처음 스스로 집에 데려온 친구와의 불화는 확장되기 시작한 세계의 일부분이 무너지는 것 같았겠구나.

너의 일부가 무너지는데 엄마가 너무 몰랐구나.

엄마가 너를 지키지 못했구나.

미안해...

미안해...





담임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그동안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드리고

오늘 정말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재차 말씀드렸다.

담임선생님께서 경우에 따라서

학폭으로 볼 수도 있을 사안이다.

어린 아이들 간의 일이라 어른들은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수도 있지만,

아이는 매우 심각한 일로 받아들일수 있다.

일단 아이 마음을 잘 보살펴주고, 그 친구와의 문제에 대해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해주시라고

강조하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학폭이라니, 학폭은 왕따시키고 주먹질하고

그런거 아니었나?

이런 일도 학폭이 될 수 있구나.

학폭이라는 단어가 다시 머리를 어지럽힌다.

아, ‘이런’ 일이 아니구나.

아이에게 정말 ‘심각하고 괴로운’일이구나.

조금 더 참자, 조금 더 다녀보자는 말로

피눈물 흘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네 마음의 소리를 외면했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학원 선생님께는 아이에게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이었는지 설명하고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제일 잘못한 사람은 엄마인 나였지만,

앞으로 다른 아이들을 보살펴야하는 학원 선생님들께도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학원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아이를 괴롭히고 놀리던 친구가 ㅇㅇ이에게

사과하고 싶어하니 시간될때 학원으로

우리 아이를 데리고 오면 사과를 받고 화해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마음이 회복되지 않은 우리 아이는 그 사과를 받고 싶지 않았고, 우리는 선생님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이끼리 서로 핸드폰 번호도 아는 사이인데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면 전화나 문자라도

오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다.

어린 아이라서 그랬을까.

연락은 끝끝내 오지 않았다.

같은 스쿨버스를 타는 사이인데도 아침에 눈인사는 커녕 우리 아이를 무시하고 지나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 일이 일어난지 6개월이 지났다.

아이는 예전처럼 혼자 놀이터에 나가서

친구들과 한참을 뛰어놀고 오지 않는다.

하교 길에 사람이 없는 놀이터에서 그네를

몇 번 타다가 들어오는게 전부다.

그 친구와도 여전히 인사도 안하고

서로 무시하며 지낸다.

그 친구에게 동조했던 다른 친구들과는

다시 사이좋게 잘 지낸다고 한다.

그러나 주동자였던 그 친구와는 다시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한다.



그 일은 아이와 나에게 많은 생각의 변화를 줬다.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한다는 유아기 발상을

뿌리 깊이 바꿨다.

어른도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아이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지내야만 한다고 강요하랴.

양보와 배려도 일단 서로에 대한 존중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존중받아야 다른 이도 존중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먼저 다가가서

배려하라고 말할 수 없다.

먼저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은 마음이 훨씬 단단해진

이후로 미뤄도 충분할 것이다.

아이의 세계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수많은 관계에서 상처받을 일이 종종 생길 것이다.

아이는 나를 지키면서 관계를 맺는 방법을,

부모는 뒤에서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이가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언젠가 어떤 만화책에서 봤던 장면이 떠오른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등산을 한다.

처음에는 부모가 자녀 앞에 서서 걷는다.

어린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며 앞을 간다.

산 중턱, 조금 더 자란 아이는 부모와 나란히 걷는다.

이윽고 정상이 멀리 앞에 보이는 지점에서

청년이 된 아이는 부모를 앞서서 걸어간다.

부모는 그저 아이의 등을 보며 다치지는 않을까

살피며 걷는다.



지금 나와 내 아이는 산의 어디쯤을 오르고 있나

생각해본다.

이제 슬슬 앞에서 걷던 잰 걸음을

천천히 늦춰서 조만간 나란히 걸을 준비를 할

시기가 오고 있는 것 같다.

부모는 어디에서 걷든지 간에

두 귀는 아이에게 향해 있어야 한다.

눈은 위험한 것이 없나 살펴보더라도

귀는 항상 아이의 목소리를 들어야한다.

언제든 아이 목소리에 반응할 수 있도록.

내 귀가 좀 더 아이에게 고정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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