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은 훌륭한 학습코치였다.
전국을 휩쓸었던 포켓몬 열풍.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곱살까지도 영어영상 아니면 주말에 뽀로로나
콩순이를 보던 아이였다.
(우리집은 주중엔 영어영상, 주말에는 보고 싶은 모국어 영상을 본다는 규칙이 있다.)
신비아파트나 마이리틀포니는 무서워서 못보겠다고 하던 아이였다.
그러나 마성의 생물 피카츄와 이브이에 홀딱 반한 딸은 포켓몬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사랑과 진실, 어둠을 뿌리고 다니는 귀염둥이 악당 로켓단은 인지상정이라는 사자성어를 알려줬다.
그렇게 아이가 태초마을에서 온 지우와 함께 모험을 할 때, 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할 일을 잊지 않고 스스로
챙기게 할 수 있을까?
아이에게 엄마가 집에 오기 전까지 수학문제집과
동시쓰기를 해놔야한다고 당부를 했다.
그러나 아이는 당연히 놀기 바쁘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딸 눈치보느라 친정엄마는 아이에게
공부하자고 닦달을 해야했고,
나는 초등입학을 앞두고 있으니 초조한 마음만
커져갔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이가 하라는 수학은
안해놓고 포켓몬을 그리고 놀고 있으면 티는 못내지만 울컥 화가 솟아오르기도 했다.
아이는 놀아야하는 것이 당연한건데
너무 큰 욕심을 부리는걸까.
진짜 애 잡는 극성엄마가 되어버린 것일까.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엄마! 나도 열 살이 되면 지우처럼 모험을 떠날래! 나도 포켓몬 잡고 싶어!"
"그래그래. 엄마도 초등학교 다닐 때 포켓몬 잡고 싶어서 포켓몬 빵 많이 사먹었어.
거기있는 띠부씰 모으려고. 엄마방 창문에 붙여놨었지."
나 어릴 적에도 포켓몬이 인기였는데 세월이 흘러 내 아이까지 포켓몬이라니.
꼬마였던 내가 TV에서 방영하던 베르사유의 장미를 볼 때, 내 옆에 앉아서 아련하게 같이 TV를 시청하던 우리 엄마의 마음이 지금 나와 같을까.
나는 아줌마가 되었는데 지우와 웅이, 이슬이는 늙지도 않고 그대로구나.
포켓몬이 세상에 진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꼬마로 돌아가서 현재의 복잡한 심경은 넣어두고 아이와 함께 지우의 모험을 즐기던 순간이었다.
아!!!!!!!포켓몬을 잡으면 되지!!!!!!!!
흘러넘치는 물을 보고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처럼,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깨달은 뉴턴처럼,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는 고래를 본 우영우처럼.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난 나는 당장
인스타그램을 켰다.
며칠 전 봤던 교육인플루언서의 글을 찾았다.
아이들이 재밌게 공부할 수 있도록
계획표를 만든다는 글.
그 분은 매일의 보상으로 주말에 게임할 수 있는
시간을 쿠폰처럼 제공한다고 하셨다.
그래. 자기주도학습의 기본 준비물은 학습계획표다.
계획표는 아이와 함께 의논하고 직접 쓰면서
해야한다는 생각에
그건 학교 입학하면 같이 해보기로 하고,
지금은 시작이니 수학문제집과 친해지는 것부터
하자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계획표를 빼자니 단팥 빠진 호빵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계획은 아이와 의논해서 세우고,
해야할 일을 눈으로 보면서 완료된 것은 체크하는 과정을 연습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았다.
미취학 아동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보상도
아직은 중요했다.
아이에게 동기부여를 시켜주기에는 물질적인 보상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아이에게 매력적이면서 어른 마음에도 흡족할만한 보상이 생각나지 않았다.
유명 인플루언서의 아이들처럼 조금 더 큰 아이들에게는 게임시간이나 영상시청시간 쿠폰 같은 것도
활용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엄마 말을 잘 따라주는 나이라 그것이 큰 의미는 없을 것 같다.
이 부분이 고민스러워서 계획표를 시작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포켓몬을 보던 나는 이 부분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다.
그래! 보상은 포켓몬이야!
지우가 포켓몬을 한 마리씩 잡듯이 매일 해야할 공부를 다 하면 포켓몬을 한마리씩 잡게 하면 되겠다!
중국산 저렴한 피규어 벌크를 살까, 포켓몬 카드를 살까 하다가
그것조차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형태이든 간에 아이는 지우처럼 내가 포켓몬을 잡는다는 행위에 만족을 할 것이기 때문에
돈을 들여서 장난감을 늘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재우고 보상을 마련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켰다.
포켓몬 공식 사이트에 들어갔다.
역시나! 공식 사이트에 포켓몬 도감이 있었다.
포켓몬 도감에 포켓몬을 하나씩 캡쳐해서
파워포인트에 갖다붙였다.
그리고 그 파워포인트를 인쇄해서 자르고,
코팅까지 했다.
눈물 나는 엄가다(엄마의 노가다)였다.
보다 못한 남편이 옆에서 같이 도와줬다.
아빠의 노동력까지 합해지자 빠른 속도로
보상이 만들어졌다.
계획은 그 때 당시에 해야할 일을 상황에 맞게
작성했다.
예쁘게 계획표를 만들고 매일 어떤 포켓몬이 나올지 궁금하게 포켓몬은 뒤집어서 붙여놨다.
계획표는 점점 업그레이드 되었다.
1년 가까이 지난 후 만든 계획표에는
포켓몬을 다 떼면 색칠놀이를 할 수있는
밑그림도 넣었다.
완성된 계획표는 거실 벽에 아이 눈높이에 맞춰서 붙여놨다.
내일 아이에게 설명해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가 생각하기엔 꽤 괜찮은 아이디어 같은데 아이도 좋아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다음날 아이에게 설명을 해주니 아이는 본인이 포켓몬 마스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즐거워했다.
그 날 퇴근하고 돌아오니
아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엄마! 내가 처음으로 잡은 포켓몬이야."
전날 저녁 눈물의 엄가다로 완성한 코팅종이 하나가 앙증맞은 손바닥 위에 올려져있었다.
그 이후로도 아이는 신이 나서 매일매일 포켓몬을 잡기 위해 공부를 했다.
제일 공부하기 싫어하는 날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귀여운 포켓몬을 보상으로 붙여놨다.
무슨 포켓몬이 나올지 기대하며,
그 날 붙은 포켓몬의 뒷모습을 보고 유추하며
아이는 매일매일 공부했다.
포켓몬 종류가 너무 많아서 1년 넘도록
포켓몬을 잡았다.
1년이면 공부 습관을 잡기에 충분하다.
이제는 포켓몬이 없어도 계획대로 공부하는 것이
습관화 되었다.
최근에 언제까지나 피카츄와 여행할 것 같던 지우가
세계 챔피언이 되었고,
그렇게 포켓몬이 막을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25년만에 세계 챔피언이 된 지우의 소식을
일본에서는 긴급속보로 알리고
시내 큰 스크린에 그 영상을 띄웠다고 한다.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서 지우의 챔피언 소식을
축하해줬다고 한다.
그 기사를 보고 피식 웃었지만 어쩐지 눈물이 났다.
어른이 된 내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어린 날의 나에 대한 작별,
그리고 태초마을을 떠나던 어린 지우처럼
이제 학교에 입학하고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어른이 될 내 아이를 상상하며 생기는
아쉬움이랄까.
여러모로 포켓몬이 나를 울리고 웃긴다.
어쨌거나 아이를 키우면서,
그리고 자기주도학습을 시작하면서
포켓몬은 나에게 김주형 쓰앵님 못지 않은 믿음직한 학습코치이다.
만약 아이가 공부를 하기 싫다면 계획표와 함께 이렇게 피카츄의 말을 전해주고 싶다.
"어머님.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합니다삐까-"
네. 쓰앵님. 믿어요!
※ 계획표 서식은 블로그에 업로드 해뒀습니다 :)
블로그 주소: https://blog.naver.com/songblesse/222844760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