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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 Dec 13. 2021

04. 산타클로스로 섭외되다.

남편아 잘할 수 있겠니

"꼬미 아버님께 일일 산타클로스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며칠 전 꼬미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서는 원장 선생님께서 따라 나오시며 어린이집의 크리스마스 이벤트 날 남편에게 일일 산타클로스를 부탁하고 싶다 말씀하셨다. '꼬미 아버님께서 아이들에게 참 '스윗'하신 분인 것 같다'고 덧붙이면서.


'스윗'이라니. 남편아, 너도 드디어 인간이 되어가는구나.

남편과 고등학교 동창으로 만나 서로 알고 지낸 지 어느덧 인생의 반이 지났다. 연애는 다섯 해 조금 넘게 했고, 얼마 전에 여섯 번째 결혼기념일이 지났으니 우리의 인연도 평범하지는 않구나. 어쨌든 편을 그럭저럭 아는 입장에서, 남편이 '스윗'이라는 단어를 듣게 된 건 순전히 꼬미 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웃는 얼굴이 참 멋진 사람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표정이 다양하진 않았다. 말투도 - 여느 남자들처럼 - 무뚝뚝하며 자신을 제외한 세상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는데. 첫째가 태어난 이후 저 남자에게도 이런 표정이, 이런 목소리가, 이런 말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 놀람을 넘어선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곤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딸은 아빠를 자상한 인간으로 만든다.


딸에게 어찌나 진심인지. 언젠가 남동생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꼬미 몬생겼어~'했다가 남편의 이글거리는 눈에 사라질 뻔했다는 이야기는 그저 사소한 에피소드. 어느 날은 꼬미를 안고 있다가 '꼬미가 아플 것 같은 몸이야. 내가 얘를 키웠기 때문에 나는 알 수 있어.'라고 하길래 뭔 황당한 소리를 하나 했는데 실제로 그다음 날 아이가 열이 났던 일도 있었다. 요즘은 꼬미가 말을 꽤 잘해서 전화하는 재미가 생겼는지 종종 내게 전화 걸어 다짜고짜 미 바꿔라고 한 후 둘이 깨가 쏟아지는 "혀 짧은" 통화를 한다.


동생 돌 촬영 따라가서 본인이 화보 촬영 하심


"아빠아~ 나는 지금 또미 뚜따(예방접종) 맞는데 따라가~ 나는 안 맞아! 아빠는 언제 와?"

"또미 무슨 주사 맞는대? 아빠 이따가 저녁에 갈게~"

"또미 뚜두랑 호오혀어(수두랑 홍역) 뚜따 맞는대. 아빠 양파링 사와"

"아라'쪄' 다른 건 먹고 싶은 거 없쪄?"

"음.. 내가 생각해보고 알려줄게~ 아빠 길 건널 때 빠가부(빨간불) 조심해~"


그리고 그 통화를 자동 녹음해서 심신이 피로할 때마다 혼자 낄낄거리며 들으니. 나랑 연애하던 시절에도 이렇진 않았잖아?

 



원장 선생님께서는 꼬미네가 우리 어린이집 식구가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몇 주 전 남편이 꼬미를 등·하원 시키는 모습을 보며 꼭 부탁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꼬미는 여차 저차 한 사정으로 세 살 때부터 차를 타고 다녔던 국공립 어린이집과 헤어지고 코로나 바이러스를 핑계로 여름 내내 집에서 뒹굴다가 가을부터 아파트 바로 옆 동의 가정어린이집으로 옮겨서 적응 잘하며 다니는 중이다. 그래, 남편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을게다. 남편은 딸이 태어난 이후 지나가는 다른 아가들에게도 관심이 생기고 다 예뻐 보인다고 했으니, 그런 모습도 반영되었겠지. 일단 당사자에게 물어보겠다고 하고 그날의 섭외를 보류하였다.


남편은 12월도 바쁜 일이 많아졌네, 왜 많은 아빠들 중에서 자기냐, 자기는 그런 거 못한다, 등등 툴툴거렸지만 결국 하겠다고 했다. 일정상 날짜 확정은 일주일 정도 전에 할 수 있다고 전하라면서도 휴가를 받아 사실상 날짜도 정했다. 아이들이 잠든 밤 혼자 '호우~호우~호우~ 뭬에리 크리스마스~' 연습도 한다. 원장 선생님께서는 10분 정도의 짧은(?) 마술이나 율동을 준비해주면 아이들이 참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다. 남편은 뭐 그런 걸 다 시키냐고 하면서도 아동가족학과 출신인 나의 사촌동생에게 연락해서 조언을 구하라고 했다. 그렇게 얻어진 유튜브는 요즘 밤마다 돌려보겠지.


오늘 아침 등원 길에는 원장 선생님께 산타 옷과 수염, 벨트 등 분장 도구도 받아왔다. 남편아 드디어 실전이다. 어린이집 산타클로스도 해 보고. 학부모 다 되었네. '꼬미가 아빠인 걸 모르게 하실 수 있겠죠?' 글쎄요 선생님, 둘이 영혼의 단짝이라는데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보라고 할게요. 일단 열흘 남았으니 그동안 마술쇼 맹훈련을 시키겠습니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도 조심하구요!




- 부록 -

원장 선생님께 남편이 12월에도 일정이 바빠서 날짜 확정은 조금 늦게 하게 될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던 날, 선생님께서는 남편이 어떤 일을 하는지 물어봐도 되냐고 하셨다.


"회사원이에요~"

"어떤.. 회사..?"

"외국계 투자은행이라고 하네요."

"아~ 은행원이시구나~ 외국계라 하시면 SC제일은행인가요?"

"아 선생님, 거기는 아니고, 흠..."

"아 그러면 제2금융권..?"

"아 제2금융권도 아니고.. 흠.."


종종 남편이 금융권에 있다고 하면 무슨 회사를 다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경우가 있다. 양가 부모님들께서도 - 남편은 도무지 설명을 안 하니 -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시기도 하고. 질문에 대해선 적당한 선에서 대답해 드리곤 하는데, 사실 남편 이야기를 들으면 흥미로운 점들도 꽤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업종은 아니다 보니 일에 대한 이야기도 나 같은 바깥사람에겐 재미있다. 같이 일하는 등장인물들도 캐릭터가 명확하고. 업계가 좁고 좁다 보니 업계 뒷이야기도 흥미진진해서 나는 가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본다. 남편은 그런 내 반응이 재밌는지 더욱 뜸 들이며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이야기를 한다. 하, 이런 뒷 이야기들을 "The Bankers"라고 제목 붙여서 10회짜리 글로 남겨보고 싶은데. 바쁘디 바쁜 업계 분들이 내 글을 읽을 가능성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좁은 업계라고 하니 혹시나 남편이나 남편에게 이야기를 전해준(!) 동료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섣불리 도전할 수가 없다. 실제에 바탕한 구를 잘 버무려 작가적 상상력이라고 주장하소설 장르로 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글솜씨가 부족하다. 언젠가 가능할 날을 꿈꾸며. 또미가 운다. 일단 점심이나 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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