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특집] 장자, 『莊子[장자]』
기존에 생각했던 나의 ‘앎’과 장자의 ‘앎’은 그 출발점부터 차이를 가지는 까닭에 현격하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나는 그 근본적 차이가 무엇인지, 그 차이로부터 어떻게 나의 ‘앎’과 장자의 ‘앎’이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앎’은 곧 나의 아상이며, 따라서 ‘앎’의 확장은 곧 자아의 확장이다. 이를 위해선 먼저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전제해야 한다. 그 다음, 無에서 무한한 有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주체가 아니라고 여겨지는 객체들을, 심지어 주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몸뚱이 조차도, 이름을 붙임으로써 무수히 구분하고(분절시키고) 분류하며 인위적인 질서를 부여한다. 그렇게 질서를 부여한 것들을 나의 자아의 영역으로 편입시키고 내가 ‘알고’ 있다고 믿게 만듦으로써 자아를 비대하게 하려는 시도가 나의 ‘앎’인 것이다.
반면 장자의 ‘앎’은 정반대로 자아의 축소, 그리고 종래에는 한없이 작아진 자아가 해체되어 실체론적 세계를 깨닫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먼저 주체와 객체의 구분 없음을 전제해야 한다. 우리가 無에서 인위적 구분, 분류, 질서의 부여를 통해 무한한 有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하나를 하나라고 이름 붙일 수조차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하나를 하나라고 부를 때, 이미 그 하나와 하나라는 대상을 지칭하는 나 사이의 구분이 전제되는 까닭이다. 이렇게 주체와 객체의 구분 없음을 깨닫게 되면, 실은 ‘나’라는 것은 모든 것이 구분되지 않는 만물제동의 세계 그 자체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의 현존재는 그 세계에서 하나의 사건, 파장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내가 물상들의 차이가 실은 나의 인식과 분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은 주체와 객체의 구분, 혹은 그와 동시에 생겨난 자아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당연한 귀결이리라.
나는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고, 그 또한 내 앎의 영역으로 포섭하고자 시도했다. 물상들의 차이가 외적,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고 그것들을 밝혀내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게 곧 나의 배움이었다.
반면 장자는 알 수 없는 것들에 침묵했다. 또한 오히려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道는 밝힐 수 있는 경지에 있는 것을 지의 영역으로 가져오려는 시도가 아니다. 사변론적인 분별지가 사라진 상태에서 증득하는 상태가 곧 道이지, 머리로 짜내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에게 ‘앎’의 실천은 자폐적 자아에 기반한 이해를 외부로 확장하고,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자아가 견고해지는 만큼, 나의 아집 또한 견고해졌다. 이것을 확장하다 못해 다른 이들에게 주입하고자 시도했다. 이는 장자가 볼 때 다른 이를 죽이는 흉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 장자에게 ‘앎’의 실천은 無爲로써 행함이다. 아무 것도 인위적으로 행하지 않음을 통해 행하는 것이다. ‘앎’의 실천은 아상에서 벗어나 우주론적인 자아로서 행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앎에 이르는 길은, 동분서주하며 ‘앎’을 좇는 것이 아니라 실은 나 자신이 우주론적 존재임을 깨닫는 ‘회복’의 과정인 것이다.
이를 종합하자면, 내가 ‘앎’이라고 믿어왔던 것은 장자의 입장에서 볼 때, 외려 진실된 ‘앎’에서 멀어져 자폐적인 아상으로 천착하는 것이었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